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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접몽 Apr 29. 2021

곽재구 시 「사평역에서」

곽재구 시인의 글은 시보다는 여행 산문집을 많이 접했고, 그것이 기억에 남는다. 『곽재구의 포구기행』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도, 그다지 독서를 즐기지 않는 사람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법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면에서 그렇냐면, 전국의 포구를 돌며 쓴 여행 산문집 『곽재구의 포구기행』은 2003년 MBC <느낌표> '책을 읽읍시다'의 추천 도서로 선정되어 인세와 판매수익금이 '기적의 도서관' 건립 기금으로 사용되었고, 2005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한국의 명저 100선'에 선정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내가 곽재구 시인의 시를 음미하는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생각한 데에는 곽재구의 신 포구기행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 참 좋았다』에 담긴 글을 읽고 나서였다.


포구마을의 불빛들이 생일초의 불빛 같습니다. 생의 어느 신 하나는 내게 이 포구마을의 불빛들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이 시간들 속에서 나는 위로받고, 갈망뿐인 나의 시가 더 좋은 인간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작은 물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꿈을 꾸게 됩니다.

(출처: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 참 좋았다』 중에, 2018년 7월 와온에서)


시인의 눈을 통해서 보니 포구마을의 불빛들이 다르게 다가온다는 생각이다. 선물 같은 시선이다.


곽재구 시인은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사평역에서」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오늘은 「사평역에서」를 감상하는 시간을 가져본다.





사평역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때로는 '삶은 계란' 같은 농담으로도, 때로는 묵직하고 버거운 물음표에 짓눌린 기분으로도, 그리고 곽재구 시인이 말하는 저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도 알 것 같다. 오늘은 커피 한잔 더 마시면서 답도 나오지 않는 물음,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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