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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접몽 May 20. 2021

김삿갓 시, 시승(詩僧)과 함께 읊음, 천지만물의 역려

문득 김삿갓 시집이 눈에 들어온다. 처음 이 책을 구입했을 때 말고는 그냥 책장에 고이 모셔두고 있었으니 방랑시인의 마음이라도 꺼내놓아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뭐 사실은 내가 감상하겠다는 것이지만 무언가 이유를 끌어다 갖다붙이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리고 오랜 시간을 음미하며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딱 두 편만 감상하기로 했다. 예전에 좋았다고 표시해둔 시들 중에서 두 편만을 이곳에 적어본다.




이 책이 1987년 초판 1쇄 발행 이후에 2012년 3판 2쇄 발행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으며 김삿갓의 시를 음미했겠다는 생각을 하니 그 책들이 어느 집에 어떻게 자리하고 있는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이 책의 맨 앞에는 옮긴이가 '이 책을 읽는 분에게'라는 글을 적고 있다. 거기에 나온 내용을 발췌해서 담아보겠다.



김병연 (1807~1863)

조선시대의 방랑시인. 속칭 김삿갓 혹은 김립.



·세상 사람들은 김삿갓을 대천재요, 대기인이자 대광인이며, 대철인, 대주가, 대걸인, 대방랑시인이라고 한다. 이렇게 그를 일컫는 바와 같이 그는 57세의 평생을 두고 팔도강산을 몇 차례씩 두루 방랑한 화려한 걸인이었고, 이백에 필적할 만한 시선(詩仙)이었지만, 인생으로서는 두보 만큼이나 불우했다.

·재치와 해학과 풍자가 넘치는 그의 시 속에서 우리는 인생의 무상을 체득한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고, 빌어먹으면서 세상을 편력하여 남긴 그의 작품에서 모든 인간사를 초월한 초인적인 천재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추우나 더우나 흰 겹옷을 입고 머리에는 커다란 삿갓을 쓰고 단장을 벗삼아, 오늘은 석양에 비끼는 산 그림자를 영탄하고 내일은 주막집에서 술로 시름을 잊으며, 행운유수(行雲流水)와도 같이 일생을 방랑하며 시대의 울분을 토했던 것이다.

·폐족의 자손으로서 세상의 학대와 멸시를 받던 김병연은 과거에서 김익순의 죄를 맹박하여 장원급제했으나, 그 김익순이 자기의 조부라는 것을 알고는 세상을 원망하여 마침내 22세 때 홀연히 집을 뛰쳐나갔다. 이때 그의 큰아들인 학균이 태어났으나 돌아보지 않았고, 2년간을 방랑하다가 24세 때 다시 집으로 돌아와 차남 익균을 낳고 나간 뒤로는 세상을 떠나기까지 한 번도 집을 찾지 않았다. 차남인 익균이 세 번이나 병연을 찾아 집으로 돌아오게 하려 했지만 끝내 뿌리치고, 평생을 방랑하다 57세의 나이로 전라도 동복이라는 객지에서 불우한 일생을 마쳤다.

·삿갓은 햇볕을 막아 주고, 비가 오면 비옷 구실도 하며, 하늘을 부끄러워하고 사람을 꺼리는 마음을 가려 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언제나 삿갓을 쓰고 다니면서 평생을 방랑하며 서럽고 안타까운 일생을 보냈다. 이런 이유로 세상에서는 김병연을 김립(金笠) 또는 김삿갓이라고 일컫게 된 것이다.

(출처: 김삿갓 시집, 범우사)

시승(詩僧)과 함께 읊음






아침에 입석봉에 오르니 구름이 발 아래 일고



저녁에 샘물을 마시니 달이 입술에 걸리누나.



시냇가의 소나무 남쪽으로 누우니 북풍이 부는 줄 알겠고



난간의 대나무 기둥 동쪽으로 기우니 해 저문 것을 알겠구나.



절벽이 제아무리 위태로와도 꽃은 웃으며 서 있고



봄볕이 제아무리 좋아도 새는 울며 돌아가도다.



하늘에 하얀 구름 흐르니 내일은 비가 오겠고



바위틈에 나뭇잎 지니 올 가을도 지남을 알겠네.



남녀가 짝짓는 덴 기유일이 가장 좋고



밤중에 아이 낳는 덴 해자시가 최고로다.



그림자 녹수에 잠겼으되 옷은 젖지 않고



꿈속에 청산을 걸었지만 다리는 아프지 않도다.



까마귀 떼 나는 그림자에 온 집안이 저물고



외기러기 우는 소리에 온 세상은 가을일세.



가죽나무 부러지니 달 그림자 난간에 어리고



참미나리나물 맛 좋으니 만산에 봄빛이라.



돌은 천년을 굴러야 땅에 떨어지고



산봉우리는 한 자만 자라면 하늘에 닿겠구나.



청산을 얻었으니 구름은 거저 얻고



맑은 물에 이르니 고기가 절로 오누나.



가을 구름 만리에 펼치니 고기 비늘 하얗고



마른 나무 천년을 묵으니 녹각이 높도다.



구름은 나무하는 아이 머리 위에서 일고



산은 빨래하는 아낙네 손안에서 울리누나.



산에 오르니 산새가 쑥국쑥국 울고



바다에 이르니 물고기가 풀떡풀떡 뛰노누나.



물은 은절굿공이가 되어 절벽을 찧고



구름은 옥으로 만든 자 되어 청산을 재도다.



달빛도 희고 눈도 희니 온 천지가 희고



산도 깊고 물도 깊으니 객수 아니 깊으리요.



등을 켜고 끔으로써 낮과 밤을 구분하고



산 남쪽과 북쪽으로 음지 양지 가르도다.







해설


금강산 입석봉 아래 어느 암자에 시를 잘 짓는 승려가 있어서 패자의 이[齒]를 하나 뽑는다는 조건으로 시 짓기 내기를 자주 하는데, 이 승려는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김삿갓은 이 말을 전해 듣고 그 승려를 찾아가 내기를 했다. 시승(詩僧)이 "朝登立石雲生足"하고 읊으면 김삿갓이 "暮飮黃泉月掛唇"하고 되받는 형식으로 번갈아 한 구씩 읊었다. 앞의 원문에서 왼쪽이 시승의 것이고 오른쪽이 김삿갓의 것이다. 이 내기에서 김삿갓이 이겨서 마침내 그 시승의 이를 뺐다고 한다. 두 시인의 호탕한 기상이 잘 나타나 있고, 특히 한자의 음과 훈을 빌어서 표현한 구(句)가 퍽 인상적이다.

(김삿갓 시집, 95~96쪽)








천지만물의 역려(逆旅)







조물주가 만들어 놓은 이 세상은



말 타고 지남을 문틈으로 보는 것처럼 흘러가누나.



천지 개벽한 후 아침이 있고 저녁이 있으니



순식간에 섞여서 오고 가도다.



아득한 억천 겁 우주를 되돌아보니



도통력(道通力) 있는 도사 이미 머문 곳일세.



천지는 무한하나 만물은 유한하고



그 중에 백년을 내가 맞이하도다.



몽선의 현묘함은 짧고 긴 글이요



석씨의 자비로움은 넓은 세상 덮은 말[語]일세.



보잘것없는 백년의 삼만 육천 날은



술잔에 어리는 청련(靑蓮)이요 꿈과 같은 곳일세.



동쪽 화단은 복숭아꽃 오얏꽃 핀 봄날 한때로



물거품 같은 이 세상 길게 탄식하도다.



세월이 가고 오는 순간에



혼돈한 만물은 사는가 싶자 금세 죽는구나.



오직 사람이 만물 가운데 으뜸이라 하지만



변해 가는 것 보면 크고 작은 것이 없도다.



산천은 초목이 번성해 가는 곳이요



제왕 제후는 흥망의 시초라네.



이 천지간에 큰 집을 하나 지으니



지황, 천황이 인간을 다스리도다.



터를 마련하는 헌제는 뜰을 넓히고



돌을 다듬는 왜황은 주춧돌을 높이네.



나그네가 늙은이에게 한 푼을 얻으니



밝은 달과 맑은 바람으로 서로 주고받누나.



극락 세계의 늙은 몸이 자리 쓸고 기다리니



세 번이나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로 변하는 것 보았도다.



서산에 해 떨어지니 나그네는 제나라에 머물고



신루에 가을 바람 부니 나그네 초나라를 지나노라.



신선계의 첫닭 우는 소리 들리니



끝없는 나그네길에 너와 내가 없도다.





해설

이 시는 우주·만물의 이치를 궁구하고 천지가 개벽한 이래 무한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간은 그 속에서 짧은 세월을 살며 덧없이 흘러가는 나그네임을 묘사하고 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부귀하게 살든 궁핍하게 살든 한번 죽어 저승으로 떠나는 것은 모두 마찬가지이니, 모두가 각자 나그네길을 걷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김삿갓 시집, 144쪽)





천재시인의 풍류를 두고두고 음미하고자 한다. 처음 김삿갓 시집을 읽었을 때에 다짐했던 그 마음조차 잊고 있었는데, 이번에 이렇게 김삿갓 시집을 꺼내들고 보니 종종 감상의 시간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그 마음을 기억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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