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물건의 세상

정리를 책으로 배운 정리 귀차니스트의 정리 이야기

by 호접몽

상상이 현실이 되고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데에는 질량을 가지는 실체인 물질이 필요하다. 그러니 어떤 물건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것이 우리의 세상이 되는 것이다. 예전에 보았던 영화 <레드 바이올린>이 떠올랐다. 바이올린의 장인이 혼을 불어넣어 완성한 완벽한 바이올린이 3세기를 떠도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검색해보니 '전지적 바이올린 시점'이라고 누군가가 글을 남겼는데 그 말이 맞다. 어떤 물건은 혼까지 갈아 넣어 만들어지니 어떤 부분에서는 함부로 소유하기 두려워진다.



어쨌든 우리에게는 물건이 필요하다. 늘 우리 곁에는 물건이 존재한다. 인식을 하든 안 하든, 일상의 소소한 물건부터 아주 큰 의미를 지니는 물건까지 항상 곁에 존재한다. 오늘은 물건들에 대한 조금 특별한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사물의 중력』을 떠올려본다. 저자가 소유했던 물건들에 대한 기록이자 삶의 인덱스 같은 것이라며, 그 물건들에 작별 인사를 하는 글이다.


나는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편이었으니 어느 순간에는 항상 곁에 두고 나의 인덱스 같은 느낌으로 소유했던 물건들이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는 애착이 없었나 보다. 어렸을 때의 애착 인형은 좋은 곳으로 보낸다며 떠나보낼 때 군말 없이 동의했다. 사실은 몇 군데 떠돌다가 버려질 거라 예감했는데, 중학생 때 그런 생각을 했으니 긍정적이지 못하고 믿음이 부족한 아이였나 보다.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난 그 인형 친구들이 그 무렵, 소각되었으리라 굳게 믿고 있다. 게다가 옷이든 가방이든 그렇게까지 마음에 들어서 설레는 것은 없었다. 그래도 한동안 내 곁에 머물던 물건들이니 떠오르는 대로 갖가지 물건들에 대해 찬찬히 생각해본다.



처음 내 돈 주고 손톱깎이를 살 땐 인생의 큰 비밀을 알아버린 기분이 들었다. 한 세트의 가구를 꾸린다는 건 이렇게 티도 안 나는 숱한 것들에 돈을 쓴다는 의미였구나. 가끔 자취를 안 해본 친구들이 “너는 혼자 사는데 뭔 짐이 이렇게 많냐?”라고 물으면 손톱깎이를 예로 들며 항변했다.
“혼자 산다고 살림이 4인 가구의 4분의 1이 되진 않아. 네 돈으로 손톱깎이를 사보면 알게 될 거야.”
『사물의 중력』 「완벽한 손톱깎이」 중에서



이 책에서 손톱깎이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자취를 해보면 생각보다 혼자 사는 데에 필요한 물건이 많다고 깨닫게 될 것이다. 아무리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더라도 꼭 필요한 물건도 사실은 많다는 것을 손톱깎이에 대한 이야기를 보며 깨닫는다.


또한 이 책에서 저자는 물건과의 의리 따위로는 물욕을 이기지 못하는 법이라는 것을 TV를 바꾸고는 깨달았다고 한다. 이 책을 읽을 무렵 나에게도 TV를 교환할 일이 있어서 더욱 공감했다. 그전까지는 맛이 가려고 할 때 가끔 한대 치면 제정신이 돌아오던 텔레비전이 아무리 때려도 돌아오지 않았다. 낡은 브라운관 텔레비전이 유명을 달리하고, AS 센터에서 못 고친다며 폐기하라고 했을 때, 내심 쾌재를 불렀다. 겉으로는 마구 안타까워하면서 한편으로는 반갑기까지 했으니 이게 바로 물건과의 의리 따위는 없는 것 아닐까.



물건을 한번 사면 버리기가 정말 어렵다. 사실 브라운관 TV도 화면이 안 나올 때까지 기다렸나 보다. TV 시청에 아무 문제없는데 그냥 버리기는 명분도 없고 힘들었기 때문이다. 멀쩡하고 이상 없고 아무 문제없는데 왜 버리겠는가. 그러니 요즘에는 아예 무언가를 사려고 하면 최신형으로 제일 좋은 걸로 사고 한동안 쳐다도 안 보기로 한다. 중간에 버리고 새 것으로 바꾸기는 환경에도 안 좋은 거 같고 마음이 불편하니 말이다.



어떻게든 마음을 바꿔 버리려고 해도 클린하우스까지 나가는 여정도 만만치 않다. 요일과 시간을 맞춰야 하니 번거롭기 그지없다. 그래서 이제는 저렴이 물건에는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엄청 쉽게 집에 들어오지만 나가는 것까지의 과정은 무척이나 고되기 때문이다.


물건은 사기보다 버리기가 어렵다. 일단 마음먹기가 어렵고 마음을 먹었대도 실행에 옮기기가 어렵다. 새 물건은 카드만 긁으면 집 안까지 배달된다. 덤도 끼워주고, 적립금도 주고, 야단법석을 떨면서 소비를 축하해준다. 하지만 처분할 때는 갖은 수고를 들여야 한다. 쓰레기를 분리하고 배출하는 것도, 쓰레기장으로 들고 나르는 것도 모두 내가 직접 해야 한다. 어디 그뿐인가. 버리는 데도 돈이 든다. 나는 이제 물건을 살 때 그것을 소유하고 즐기는 일 못지않게 버릴 일을 상상한다. 주기적으로 50리터 쓰레기봉투를 가득 채워 낑낑대며 쓰레기장으로 끌고 나가던 일, 중고거래를 하느라 시간 쓰고 스트레스받던 일, 서울을 떠나기 전날 시간이 촉박해 공업용 쓰레기 포대에 부엌살림을 쓸어 담고 친구 차로 몇 번이나 쓰레기장을 왕복한 일. 그런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둘 중 하나다. 사지 않거나, 쓰레기가 되지 않을 물건을 사거나. 버리고 버리다 얻은 교훈이다.
『사물의 중력』 145~146쪽



이 책에서 '물건은 사기보다 버리기가 어렵다'는 말에 대해 조목조목 들려주는데 정말 동의했다. 뭐라도 모아서 버리려면 돈 들고 시간과 에너지 모두 필요하니 지치고 진절머리가 나서 한동안은 물건을 안 사겠다고 다짐까지 한다. 물론 그 마음은 곧장 풀어지지만. 오늘도 사실 얼마 전 몇 번의 클릭으로 장만한 운동화가 도착했다. 상자와 예전 운동화라는 쓰레기가 발생했다. 교훈을 얻어도 물건 구매를 멈추기는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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