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 대해 글을 쓴다고 하니 옆에서 엄마가 한 마디 거드신다. "그거 쓰면 어때? 그때 그 선.글.라.스." 그렇다. 우리에게는 아찔한 추억이 있다. 미리 약속을 정해놓지 않았다면 서로를 찾아 빙글빙글 돌다가 어찌 되었을지…. 떠올리면 가슴 철렁한 기억이 있다.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먼저 나의 여행 파트너 '엄마'를 소개해야겠다.
다른 사람들과도 여러 번 여행을 다녀보기도 했지만, 아마 잘 알 것이다. 오랜 기간 여행을 함께 한다는 것은 추억도 불만도 쌓인다는 것을 말이다. 때로는 제대로 풀지 않아서 돌이킬 수 없게 되기도 한다. 생판 남과 여행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가보고 싶은 곳도 제각각이고 여행 속도도 다르니 서로 맞추려다가 힘에 겨워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다.
인도 여행을 시작으로 여행지에서 정말 감탄사가 저절로 나오는 풍경을 많이 접했다. 이상하게도 여행 중에는 가족 생각이 많이 났다. 여기도 보여주고 싶고, 저기도 그렇고. 고민하다 보니 깨달음이 있었다. '그러면 같이 오면 되겠네?!'라고 말이다. 그렇게 덜퍼덕 인도 여행부터 엄마와 함께 떠나게 된 것이다.
좋자고 떠난 여행인데 돈 쓰고 감정 상하고 힘들면 너무 아까운 일이다. 누구와 여행을 떠나든 여행 전에 서로의 의견을 허심탄회하게 솔직하고 확실히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물론 여행 중에도, 그리고 여행을 마치고 난 후에도 의견을 나누는 것은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모녀는 여행 전에 미리 주의사항을 정해놓았다. 여행지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것을 필두로 여행 도중 어떻게 위험에 대처할지, 서로 의견이 맞지 않을 때에는 어떻게 할 것인지 등 안 좋은 상황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누었다. 여행을 할 때마다 미리 정해두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온다. 분명.
모녀여행 주의사항
1. 컨디션이 안 좋거나 몸이 아플 때에는 꾹 참지 말고 바로 이야기하기
2.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것 혹은 가기 싫거나 하기 싫은 것은 명확하게 이야기하기
3. 위험지역은 가지 말고, 되도록 밤에는 돌아다니지 말기
4. 의견이 맞지 않아 싸우는 일이 생겨도 절대 그 날을 넘기지 말기
5. 숙소에 가자마자 명함 챙기기
6. 길이 엇갈렸을 때에는 엄마가 선글라스 끼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기
1. 컨디션이 안 좋거나 몸이 아플 때에는 꾹 참지 말고 바로 이야기하기.
여행지 몇 군데 덜 가도 된다. 괜히 아픈데 참다가 일정 전체가 어긋날 수 있다. 참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여행 중에 몸에서 주는 신호를 무시하면 안 된다. 무리 금지. 비상시에 꼭 필요한 구급약을 챙기는 것도 필요하다. 더운 나라에 가더라도 에어컨 바람 때문에 감기약이 의외로 많이 사용되었고, 낯선 음식을 먹는 것이니 소화제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했다. 물론 구급약은 사용할 일이 없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지만.
또한 위급 시에는 일단 병원으로 가거나 혹은 여행을 접고 귀국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그런 일은 절대 없어야겠지만, 만약의 상황을 미리 생각해두어야 한다. 평상시와는 다른 컨디션으로 푹 쉬어도 회복이 안 된다면, 일단 머물고 있는 숙소에 도움을 청하도록 한다. 그래도 해결이 안 되는 비상 상황이라면 여행을 접고 귀국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행 전에 반드시 미리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다.
2.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것 혹은 가기 싫거나 하기 싫은 것은 명확하게 이야기하기
우리 모녀는 취향이 달라도 너무 달라서 여행지에서 보고 싶은 것이나 하고 싶은 것에 대한 의견이 많이 달랐다. 어떤 때는 '엄마가 이렇게 원하시는데, 참고 또 참자!'는 심정으로 억지로 따라간 적도 있다. 주로 물건을 구경할 때에 그랬다. 하지만 "엄마, 한 바퀴 돌고 오세요. 저는 저기서 커피 한 잔 하고 있을게요!"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예전처럼 여행을 하지 못하니 애석하다.
3. 위험지역은 가지 말고, 되도록 밤에는 돌아다니지 말기
'사실 우리는 한국에서도 밤에는 잘 돌아다니지 않잖아요! 외국이라고 다를 것 없이 행동합시다!'
위험한 모험보다는 안전을 최우선시 하기에 약간은 싱거운 느낌이 들 수도 있으나, 무사히 여행을 마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그래야 다음 여행을 부담 없이 계획할 수 있으니까.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대하듯 누가 주는 음식 아무거나 받아먹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기도 하고, 밤에 몰래 돌아다니면 절대 안 된다고 잔소리를 해댔다. 이제 다 컸다고 딸이 엄마한테 잔소리한다고 하시지만, “그래도 엄마! 안전이 최고! 우리 안전하게 또 여행 다닙시다!!!” 당당히 외칠 수 있다.
4. 의견이 맞지 않아 싸우는 일이 생겨도 절대 그 날을 넘기지 말기
서운한 감정이 있을 수 있다. ‘나같으면 안 그럴텐데.’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으나, 이야기해주지 않으면 상대방이 어떻게 알겠는가? 절대 그날을 넘기면 안 된다. 찬란한 다음 날을 방해하니까.
그리고 엄마와의 여행이기 때문에 다음 두 가지는 추가했다.
5. 숙소에 가자마자 명함 챙기기
6. 길이 엇갈렸을 때에는 엄마가 선글라스 끼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기
일단 숙소에 체크인하면 만약 길이 어긋나서 서로를 찾지 못해도 숙소에서 꼭 만날 수 있도록 명함부터 챙긴다. 엄마 한 장, 딸 한 장. 숙소의 주소와 이름이 명확하게 적혀있으니 혹시 길을 잃더라도 주위에 도움을 청해서 되돌아올 수 있다.
특히 우리에게 정말 든든한 약속이 되어준 '엄마가 선글라스 끼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기'는 어긋난 길을 단번에 찾게 해 주었다.
버스나 지하철 등 이동수단에 탑승할 때에 한 명만 타게 되는 경우, 서로 찾겠다고 둘 다 왔다갔다하다가 길이 어긋날 수 있다.
“엄마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요. 선글라스 끼고…….그래야 눈에 띄니까. 하하하. 내가 찾아갈 테니까 꼼짝 말고 있어야 해요. 괜히 나 찾는다고 움직이다가 둘 다 뱅글뱅글 돌고 있으면 곤란하잖아요.”
타이베이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며 농담처럼 건넨 그 말이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위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 순간에 엄마가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우리에게는 그런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무슨 일이든 순식간에 나에게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사건이다.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톡톡한 신고식을 했다. 파리 공항에서 밖으로 나가는 Skyline을 탈 때 뒤에서 재촉하듯 나를 몰고 간 사람이 있었다. 부랴부랴 올랐는데, 문이 닫혀버렸다. 밖을 보니 엄마는 미처 타지 못하고 발만 동동! 어쩌지? 다음 역에서 만나는 것이 좋을지, 공항 밖에서 만나는 것이 좋을지, 내가 다시 처음 역으로 엄마를 찾아가는 것이 좋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일단 우리의 약속이 있으니 내가 다시 공항 입구로 엄마를 찾아갔다.
다행히 그 약속 덕분에 엄마는 처음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주셨고, 우리 모녀는 눈물까지는 아니었지만 안도의 한숨을 쉬며 상봉할 수 있었다. “네가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했잖아!”라고 하시며 그곳에 계셨다. 어떤 경우든 대비해서 미리 약속을 하는 것이 좋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제일 좋은 일이겠지만, 사람 일은 알 수 없으니 대비, 또 대비할 것! “그런데 엄마, 선글라스는 왜 안 쓰셨어요? 새벽이라서 그랬나?”
오랜만에 떠올려보니 추억이 몽글몽글. 분명 여행할 때에는 싸우기도 하고 힘든 일도 있었는데, 지금은 마냥 추억의 꽃으로 피어오른다. 다시 그런 여행을 하기 힘드니까 그런 건지, 마냥 그리워진다. 또다시 여행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주의사항도 잘 만들고 여행 일정도 강약 조절해서 멋지게 해낼 것이다. 오늘은 그냥 추억을 하나하나 떠올려본다. 커피 한 잔과 함께 하는 추억여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