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빙점

by 호접몽


여행에 대한 생각에 잠기기에는 제격인 시간이다. 여행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아쉬워하기보다는 지난 여행을 떠올리며 마냥 추억하기에 더없이 좋은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도 생각해본다. 여행을 하면서 어떤 점이 인상적이었을까. 여행에 대해 생각하고, 여행을 하는 사람에 대해 사색에 잠긴다.



같은 시공간에서 마주치는 인연이 어마어마하게 느껴진다. 나의 여행도 되짚어보면, 사람에게 실망하기도 했지만 사람 덕분에 위기를 극복하기도 했다. 여행도 인생도, 주변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것이다.



후지와라 신야의 에세이 『동양방랑』은 1982년에 출간된 문고판을 2018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사진을 슬쩍 넘겨보면 어두침침하지만 깜깜하지는 않다. 음침하고 끈적끈적하면서도 철저히 관찰자가 된 듯한 느낌으로 후지와라 신야의 여행을 바라볼 수 있는 책이다. 그 책에 보면 '여행의 빙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이 살면서 몇 번의 고비를 만나듯이 여행에도 빙점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살면서 몇 번의 고비를 만나듯이 여행에도 빙점이 있다. 여행 초기의 뜨거웠던 피는 식고 마침내 그것이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얼어붙는다. 눈앞에 나타나는 모든 인간을 일생일대의 인연으로 여기고 소중히 대하기로 했다. 변두리 유곽의 창녀에서 심산에 틀어박힌 스님까지 그 어떤 인간이든 철저히 사귀기로 했다. 여행의 중반, 갑자기 나는 회생했다. 또다시 인간이 한없이 재미있어졌다. 얼어붙은 여행이 녹기 시작했다. 나 자신을 되찾았다. 누구에게나 '빙점'은 있다. 반드시 찾아온다. 인간의 빙점을 녹이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의 체온이다.

『동양방랑』 중에서




사람이 지긋지긋한 적이 있었다. 특히 인도에서 그랬다. 문화의 차이일 것이다. 하루는 인도에서 어느 선생님 댁에 찾아가는데 길을 잘 몰라서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던 적이 있다. 이 사람은 이쪽으로 가라고 하고 저 사람은 저쪽으로 가라고 해서 그 부근을 뱅글뱅글 돌았다. 분명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리라. '잘 모르면 모른다고 이야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것은 내 생각이다. 이 사람들은 절대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성심성의껏 정답은 아니어도 어딘가 손가락으로 가리켜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사람들이 거짓말을 한다고 혼자 열 받았던 것이다. 문화의 차이였다.



인도를 떠올리니 언어의 차이에서 오는 일화가 생각난다. 기차역에서였다. 주변에서 함께 기차를 기다리는 인도 사람들이 계속해서 "기차가 오고 있다"라고 말했지만 기차는 절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기차가 왔다"라고 표현한 이후에야 저 멀리에서 기차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 이들에게 "기차가 오고 있다."는 기차편이 취소되지 않고 저쪽 어디에선가 열심히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다는 의미이고, "기차가 왔다"는 과거형으로 표현해야 플랫폼에 기차가 들어오고 있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여행을 하며 나를 괴롭힌 것도 사람들이고 나에게 도움을 준 것도 사람들이었다. 때로는 사람이 좋았고, 때로는 사람이 몸서리치게 싫었다. 사람이 싫어 자연경관에만 시선을 주다 보면 무언가 밋밋하다. 결국에는 다시 '사람'이라는 주제로 돌아오기도 하는 것이 여행이다. 어쩌면 여행 중 나의 시선을 멈추게 한 것은 사람들, 사람이었을 것이다. 얼어붙었다가 녹았다가, 그 빙점을 오가며 여행도 인생도 그렇게 흘러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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