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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립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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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나라 Jun 18. 2020

말이 없는 밥솥과 나

#3 독립은 침묵을 마주하는 일

나는 여태껏 밥솥이 당연히 소리를 내는 사물인 줄로만 알았다. 밥솥이 “쿠x가 맛있는 밥을 완성하였습니다. 밥을 잘 - 저어주세요”라고 말하면 엄마와 나는 “네-” 하고 대답하곤 했다. “어이구, 착해라” 가끔 칭찬도 해주었다. 밥이 완성되었을 때뿐 아니라 밥을 짓기 시작할 때 “백미 쾌속을 시작합니다”라든지 뜸 들일 때 “취이-”하고 큰 소리를 내어(오래된 밥솥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밥의 완성 단계를 요리 중에 쉽게 알 수 있었다. 존재감을 뽐내며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친절하게 알려주는 것, 밥을 짓기 위해 태어난 밥솥의 본분에는 그것도 포함되는 줄 알았다.


근데 독립하면서 새로 들여놓은 밥솥은 당최 아무 말이 없다. 쌀을 씻어 밥솥에 넣고 버튼을 두르면 그냥 자기 혼자 아무 말 없이 밥을 시작한다. 총 몇 분이 걸릴지 그 흔한 디지털시계로도 보여주질 않는다. 밥솥 설명서에 얼마나 걸리는지는 대략 나와있다. 백미쾌속이 35분, 백미는 40분, 잡곡밥은 거의 한 시간 수준이다. 물론 1-2인분 기준. 오래 걸리는데 정확히 얼마나 남았는 지도 확인하지 못하는 기다림이 시작된다. 그러다가 압력 취사가 시작되면 남은 시간이 말없이 표시된다고 하는데, 솔직히 밥솥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지는 않아서 언제부터인지도 잘 모르겠다. 밥이 다 되었을 때도 말이 없는 밥솥. 꽤나 어색하다.


우리집 밥 담당

그런데 맛은 또 엄청 좋다. 거의 햇x 수준이다. 쌀이 얼마나 몽글몽글하게 잘 익는지 여태까지 실패한 적이 없다. 사실 사이즈도 매우 작아 손을 넣어 손가락 관절(너클)을 살짝 넘게 찰랑거리는지, 그러니까 물 양이 맞는지 정확히 확인도 못했다. 게다가 그 5분을 못 참겠어서 백미도 아니고 백미쾌속으로 했는데도 다 맛있었다. 말도 없고 오래 걸리고 작은 내 밥솥. 1인 가구를 위해 태어난 밥솥. 이 아이는 착실하게 내 탄수화물 섭취량을 담당하고 있다.


맛있는 밥


말없이 묵묵히 집에 머무르는 것은 밥솥만이 아니다.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오면, 그러니까 적어도 오늘 내로 나 말고 아무도 안 들어올 집에 들어오면 침묵이 가장 먼저 나를 맞이한다. 현관에 놓은 디퓨저 냄새도, 환기 안돼서 나는 퀴퀴한 냄새도 가장 먼저 나를 반기는 것들은 아니다. 껌껌한 어둠은 침묵과 한쌍이라고 할 수는 있겠다. 집에 오면 서둘러 불을 켜고 그다음 블루투스 스피커를 켜니까. 하지만 불은 필요에 의해, 보지 않고는 앞으로 가기가 어려우니까 ‘보기 위해서’ 켜는 행위다. 하지만 굳이 다른 외부음을 듣지 않고도 살 수 있음에도 음악이든 뭐든 서둘러 켜는 것은, 침묵이 생각보다 무서운 놈이어서 그렇다. 혼자 사는 집에는 모든 게 조용하다.


큰 맘 먹고 구입한 야마하 플레이어


요리할 때도, 설거지를 할 때도, 화장을 지우고 화장실에 가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핸드폰을 뒤적이다 부스럭거리는 이불에 폭 감겨 잠에 들 때까지 1인 가구는 말이 없다. 말이 없는 사람들. 이곳에는 말이 없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처음에는 내 방이 끝방이어서 상대적으로 조용한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여기는 방음이 매우 취약한 오래된 오피스텔 건물이다. 아침에 알람 소리가 나서 일어났더니 내 알람이 아니라 윗집 알람이었다. 적어도 나와 맞닿은 사람들은 별 말이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들도 각자의 침묵과 싸우고 있을까. 소리를 내지는 않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착실하게 몽글몽글한 밥알을 만들어내고 있을까. 나는 이 침묵 속에서 내가 할 일을 묵묵히 해낼 수 있을까. 그러니까 독립은 침묵과 마주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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