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이 더 짙은 곳에서 자라난 내 마음 속 싱그러운 안식처, 남미
그 시기는 내 인생의 다른 시기들과는 워낙 달라서, 벌써부터 마술 같은 속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런 속성은 보통 오래된 기억에만 생기는 것인데 말이다.
당시에는 지긋지긋했지만, 이제 그 기억은 내 마음이 뜯어먹기 좋아하는 좋은 풀밭이 되었다.
- 조지 오웰,『카탈로니아 찬가』중
사람에게는 누구나 다, 자신의 마음 한켠에 언제든 뜯어먹기 좋은 풀밭 같은 싱그러운 추억이 존재한다. 우리는 때때로 그 곳에 난 풀들을 손으로 쓱쓱 뜯어서 향기를 맡고, 질겅질겅 곱씹으며 배어나오는 시간과 장면의 맛을 되새김질한다. 술자리의 단골 레파토리에 등장할 정도로 머릿속에 선명하고 깊게 남은 순간들을 끄집어내며, 우리는 그 시절을 살아낸 과거의 스스로를 만나 깔깔 웃고, 안쓰러워하며 대견해한다.
ODA(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공적개발원조의 줄임말. 선진국 정부 혹은 공공기관이 개발도상국의 발전을 위해 자금이나 기술 등을 유상, 혹은 무상 원조하는 것) 교육봉사와 파견 교사라는, 인생에서 나타난 감사한 기회를 힘껏 끌어모아 5년이라는 시간을 보낸 남미는 내게 그러한 풀밭 같은 기억 속 배경이 되었다. 어떤 이에게는 꿈결같이 들릴 정도로 멀고 아득한 저 너머에 자리한, 한국보다 강렬한 태양이 더욱 짙게 뜨는 대륙. 나는 거기서 매우 중요하고도 커다란 삶의 조각들을 만들었지만, 이 시기에 대해 그저 감사하게만 여기기에는 - 일상 속, 혹은 여행지에서 줄기차게 일어나는 각종 괴상한 일과 사건 사고로 내 뒷목을 부여잡기도 했던 날들의 무대이기도 했다. 우연 같은 필연이 층층이 겹쳐 내가 살게 된 ‘남미’. 모든 시간이 지난 지금, 이제는 들을 때마다 언제든 내 심장을 말랑하게 만드는 마법 같은 단어가 되었다.
앞으로 내가 펼칠 내용들은, 대부분의 한국 사람에게는 낯설겠지만 내게는 5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을 보낸 - 그래서인지 제법 제2의 고향처럼 가깝게 느껴지기도 하는 - 남미에서 겪었던 경험과 여행 중 일어난 일, 그리고 그 속에서 태어난 나의 생각을 모아 정리하고 엮어 하나씩 풀어낸 것이다.
이 이야기 보따리들은 지금 기준으로 대략 9년 가까이 지난 오래된 기억부터, 아직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비교적 최근의 일까지 나라와 지역을 오가며 씨실과 낱실로 직조하듯 글로 써내려 가며 완성하였다. 내게는 -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황당하며, 긍정적이거나 혹은 부정적으로 - 남미에서 깊게 새겨진 기억들이 세월이라는 파도에 끊임없이 부딪혀 한 순간의 신기루처럼 흩어져 모두 사라지기 전, 온 힘을 짜내어 다시 그리는 듯한 마음으로 적었다. 그곳에서 만든 나의 이야기가 어떤 이에게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거짓말 같이 들리겠지만, 모든 건 놀랍게도 실제로 존재했던 일과 사람을 기반으로 한다.
내가 살았던 남미 페루부터 시작해 칠레를 건너 볼리비아를 잠시 들리고, 콜롬비아와 드넓은 브라질을 거쳐 국경이 큰 의미가 없던 아마존강 유역의 정글 지역, 그리고 선뜻 떠나기 힘든 에콰도르의 갈라파고스와 칠레의 이스터섬까지 - 모두 직접 경험한 남미 내 다양한 나라와 지역을 두루 오가며, 그곳 특유의 더 짙은 태양빛을 고루 입혀 노릇하게 그을린 - 내 마음 한 켠 속 풀밭에 조금씩 쌓아둔 이야기를 조심스레 정리해서 펼쳐보고자 한다. 기억력의 한계와 기록의 부재로 인해 내가 그간 경험했던 모든 일을 풀어놓을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5년간 머물렀던 시간 속에서 만든 중요한 추억을 추리고 진하게 농축하여 글에 꾹꾹 눌러담고자 노력했다.
그러니 부디 초콜릿 상자 속에 있는 다양한 맛의 초콜릿을 하나씩 천천히 꺼내무는 것처럼 - 때로는 아무 생각없이 즐겁게, 때로는 얼떨떨하고 어이없는 기분에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때로는 갑자기 눈물이 솟아올라 울컥한 마음으로, 때로는 말로 정의되지 않는 울렁울렁하고 말캉한 감정으로, 때로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따뜻하게 읽어주시기를 바란다.
1. 남미 아르헨티나에서 살면서 알게 된 정보와 생활 경험, 그리고 나의 생각과 여행 이야기는 이미『반대라서 더 끌리는, 아르헨티나』라는 이름의 두꺼운 책으로 세상에 나왔으니, 이번 남미 브런치북 시리즈에서는 아르헨티나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이 책은 9월 국제교류재단이 주관하는 공공외교행사 주간 연계 서울 야외도서관 프로그램에서 주한 아르헨티나대사관 공식 선정 책으로 출품 및 홍보 예정이니, 아르헨티나에 대해 궁금한 독자라면 반드시 이 책을 찾아서 읽어보시길 바란다 ^^!!
2. 멕시코, 과테말라, 벨리즈, 코스타리카, 파나마, 도미니카공화국 등 중미와 카리브해 지역 이야기는 이후 이 시리즈를 마무리 지은 다음 (만일 여력이 된다면…) 서서히 정리해서 풀어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