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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chun Kim Apr 15. 2019

커피


어느 날, 사람들이 더는 커피를 마실 수 없게 된다.


누군가 커피에 독을 타고 있다. 벌써 250명이 죽었다. 온 도시가 공포에 질렸다.


원두건 믹스건 감히 커피에 손을 댈 용감한 사람은 이제 없다. 지금 커피를 마시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니까.



책의 이야기다. <커피향기>라는 독일 추리소설인데, 뒷부분이 더 흥미롭다.


커피를 마실 수 없자 사람들은 하루를 온전히 살아내지 못하게 된다. 교통사고 사망률이 오르고 곳곳에서 산업재해가 일어난다. 생산그래프가 꺾이고 GPD가 곤두박질친다.


모두들 졸음을 참지 못해 집중력이 풀려버린 것이다. 이 사회는 그간 커피를 동력으로 움직여왔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된다.


커피에 독을 탄 '시간 늦추기 협회'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가속의 시대를 살고 있다. 속도를 높이지 않는 사람, 정지해 있는 사람은 시장의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오래전부터 경제는 속도를 생명으로 여기고 있다.

 경제는 '세계의 종교'가 되어 여가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지배하고 있다. 더 빨리, 더 좋게, 더 많이, 경제는 성장을 요구하고, 성장은 가속을 요구하고, 가속은 힘과 시간과 목숨을 요구한다. (...)"






음, 지금 봐도 그럴싸하다. 괜찮은 이야기였다.


최근엔 이 책의 저자가 보면 좋아요를 꾹 누를만한 칼럼을 읽었는데, '각성과 이완'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는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커피, 레드불, 담배 같은 각성제로 낮을 보내고, 밤이 되면 각성상태를 해제하기 위해 다시 맥주, 와인 같은 이완제를 마신 후에야 잠이 든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전쟁중이다, 칼럼은 그렇게 말했다. 각성과 이완은 원래 월남전 병사들을 착취하는 방식이었다고.



흠, 진짜 그렇네.


아니 잠깐, 이거 내 얘기 아닌가?


안 되지 안 돼, 당할 순 없지. 생각을 하자. 커피는 착취인가? 커피는 저주인가? 악일까?


사회는 커피라는 연료를 주입해 나라는 기계를 풀가동하며 생산성을 높이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내가 주로 생산하는 것은 똥인데..!?)


사회는 나의 업무시간 뿐 아니라 여가시간에도 커피를 마시도록 부추겨 소비심리의 각성과 경제활동의 가속을 유도하는 걸까? (그리고 교묘히 더 많은 비데물티슈를 구매하게 하는 걸까!?)



음.. 아니다. 아닌 것 같다. 이 교묘한 착취 시스템이 사회 혹은 그 사회구조를 쥔 정부의 작품일 수는 없다. 아니 정부는 절대로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여기 명확한 증거가 있다.



이 시스템은 잘 작동한다.



사실은 알고 있다. 나를 착취하는 범인은 이번에도 나다. 더 많이 벌기 위해 한 잔, 더 많이 쓰기 위해 다시 한 잔.


안다 한들 뭐 어쩌겠는가. 커피가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를 대변한다고 안 마실 건가? 아니, 그 못된 각성도 어쨌든 나한테 필요하다. 세련된 커피숍에서 맛있는 커피를 사 마실 때 그 작은 사치가 주는 꽤 큰 포만감도 나는 좋아한다.



그냥 그렇게 사는 거다, 이번에도. 알면서 또 당하는 것이다. 어쩌겠는가. 애초에 고종황제라는 힙스터가 커피라는 것을 챙겨마시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그냥 이렇게 스스로를 적당히 착취하면서 사는 게 2019년 서울 씨리즌의 인생이 흘러가는 응당의 방식이다.


알래스카에서 태어났으면 얼음집 짓고 살고, 서울에서 태어났으면 이렇게 사는 거다.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게, 우리 시대는 늘 그런 모습으로 흘러간다. 알면서도 당하고 또 별 수 없이 매번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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