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영화 이야기 19.
북한에서는 1950년대 중반부터 민족고전을 영화로 만들 계획을 세운다. 가장 먼저 만들어진 영화는 <심청전>이었고 이후 <춘향전>이 만들어졌다. 그 외에 몇 편의 민족고전이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이중 1963년 제작된 <흥부전>이라는 영화가 있다.
<흥부전>이라고 하면 형제 사이의 우애 혹은 권선징악이라고 하는 교훈적 내용의 대명사이다. 북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교훈적인 이야기 외에 강조되는 점들이 있는데, 노동의 중요성 같은 것이다. 원작에선 매품팔이를 하려다가 나라의 경사로 죄수들을 풀어주면서 실패하고 마는데, 영화에서는 불합리에 저항하는 식으로 매품팔이를 거부하고 노동을 통해 가난을 극복하는 식으로 바뀌었다. 이는 영화가 만들어지던 천리마 시대의 노동을 통한 사회개조와도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이다.
<흥부전>에서는 착하고 성실한 흥부도 중요하지만 욕심 많고 권모술수에 능한 놀부의 캐릭터가 더 관객들의 주목을 끌었다. 이 영화에서 흥부와 놀부는 북한의 최고의 성격파 배우들인 김세영과 태을민이 맡았다. 김세영은 1948년 월북하여 초기 영화에서는 조역이나 단역을 맡았다가 1950년대부터 성격파 배우로 그 연기력을 인정받아 주인공으로 승극 했다. 특히 그가 코미디 장르에 장점을 보였는데 북한 최초의 코미디 영화인 <우리 사위 우리 며느리>에서 부정적인 인물을 연기 한 이후 북한에서 만들어지는 주요한 코미디 영화에서 항상 주인공을 맡으면서 북한 최고의 배우로 인정받았다. 그의 모습은 주로 실수를 저지르지만 곧 그 실수를 수습하고 반성하는 왠지 인정이 가는 인물로 나온다.
태을민은 아예 부정적인 인물 역으로 일가를 이룬 배우이다. 북한 최초의 예술영화 <내 고향>에서 지주 최경천 역을 시작으로 이후 나오는 작품에서마다 악역을 맡아 탁월한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이 영화 <흥부전>에서도 놀부 역을 맡아서 탐욕스럽고 비열한 생쥐 같은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제사를 지내는 장면에서 비싼 제사음식 대신 제물 이름을 종이에 써서 그것으로 대신하는데, 바람이 불어 갈비찜이라고 쓴 종이가 날아가는 걸 흥부 아들이 발로 밟자 비싼 제물을 발로 밟는다고 따귀를 때리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 영화는 김세영과 태을민의 연기 대결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볼 가치가 있는 영화이다.
김세영은 1980년대 중반까지 북한 최고의 희극배우로 활동했다. 1985년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단으로 서울을 방문해서 오래전 헤어졌던 딸을 만나기도 했다. 특히 그가 출연한 <우리 집 문제> 시리즈는 1970년대 이후 북한의 대표적인 희극영화로 잘 알려지게 된다.
태을민은 북한의 대표적인 성격파 배우로 연극무대와 스크린을 가리지 않고 출중한 연기를 이어갔다. 김정일의 신임도 대단했다고 알려졌다, 1969년 무대에서 공연 중 고혈압으로 쓰러져서 다시는 일어나 못했다. 무대에서 죽음을 맞은 천생 배우의 삶을 산 배우이다.
북한의 명배우들이 출연한 이 영화가 1960년대 북한에서 만들어진 이유가 있었다. 이 무렵 민족고전을 영화로 만드는 일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인민성을 담보하는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북한뿐만 아니라 소련과 중국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각기 고유한 민족적 유산들을 영화로 만드는데 열심이었다. 그래서 북한에서도 잘 알려진 작품들을 영화로 하나씩 만들어졌다. 그 영화들이란 민족고전을 사회주의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었다. 다시 말해 전체적인 줄거리는 일치시키지만 세세한 부분에선 각색이 이루어진다. 특히 1960년대 고전을 영화로 만드는데 문제가 되는 환상 장면들에 대해서는 특수효과 기술을 외국을 통해 흡수하면서 영화의 기술적 수준을 성장시키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