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준은 김정일 시대 가장 중요한 문화예술계 인사였다. 그의 대표작을 하나 꼽는다면 <최학신의 일가>가 첫 손에 꼽힐 것이다. 이 작품은 원래 희곡으로 발표되었으며 전쟁 직후인 1955년 초연되어 백인준이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이 작품은 최학신이라는 기독교 목사가 미국을 떠받들면서 살았는데 전쟁을 거치면서 미군에 의해 가족들을 잃게 되면서 미국의 악마성을 깨닫게 된다는 일종의 반미, 반종교 작품이었다.
<최학신의 일가>가 연극으로 공연되었을 때 찬사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북한 연극계를 주도하고 있던 국립극단 단장 황철은 이 작품에 대해 ‘계급성이 없는 작품, 인물 형상화가 잘못된 작품’으로 비판했다. 1950년대 중반 북한 최초의 인민배우로 선정되어 문화예술계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던 황철에게 그런 비판을 받았으니 작품성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1960년대 중반 김정일이 영화계를 지도하기 시작하면서 백인준의 <최학신의 일가>를 영화로 만들라고 지시하게 된다. 김정일은 이 영화가 제작되는 과정에서 제작 상황을 계속 체크하였다. 1966년 12월 27일 문학예술부문 일군 및 창작가들과 한 담화에서는 예술영화 ≪최학신의 일가≫를 반미교양에 이바지하는 명작으로 완성하라는 창작 지시를 내리기까지 했다.
북한에서 문학작품이나 희곡 등을 영화로 만든다는 것은 이미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다는 의미였다. 특히 김정일에 의해 영화화가 주도되면서 이 작품은 1960년대 북한의 대표작으로 등극하였고 백인준은 김정일의 오른팔이 되었다.
배경은 6.25 전쟁 중 평양으로 미군에 의해 일시 점령되었던 시기였다. 영화의 주인공인 목사 최학신은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미군이 평양에 들어와도 피난 가지 않고 미군을 맞이하게 된다. 이때 서울로 미술공부를 하러 갔던 아들이 국군이 되어 돌아온다. 미군과 함께 오래전부터 친구로 지내던 미국인 선교사 리처드도 평양에 나타난다. 그는 주민들의 신망이 높은 최학신을 통해 주민들을 이간질하고 공산주의자들을 잡아내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때 미군 장교는 최학신의 딸을 강간하려다가 실패하고 그녀를 총으로 쏴 죽인다. 국군이 된 아들은 자신을 친아들처럼 대해주었던 종지기 노인을 죽이라는 미군의 명령을 받고 고민하다가 미군 장교를 대신 죽이고 자신도 죽게 된다. 결국 집안은 풍비박산 난 상황에서 최학신은 공산당 지하조직으로 들어가 자신이 지금껏 미국에 속아왔다며 미군을 몰아내 달라고 부탁한다.
이 영화는 김정일의 지시로 만들어진 영화라 배역진이 화려했다. 우선 리처드 목사 역은 강홍식이 연기했다. 강홍식은 북한 최초의 예술영화 <내 고향>(1949)을 연출했으며 일제강점기부터 배우로 활동한 북한 영화계의 대명사 같은 존재로 이 작품은 그의 마지막 출연작이었다. 최학신 역은 북한을 대표하는 배우 유원준이 맡았다. 그는 <내 고향>에서 주인공 관필 역을 맡은 후부터 평생을 북한영화 속 다양한 배역을 맡아 연기한 북한 최고의 배우였다. 최학신의 부인 역의 김선영은 1950년까지 남한에서 활동하다가 한국전쟁 중 월북한 배우로 북한에서는 연극무대와 스크린을 오가며 활동했다. 한때 북한에서는 무용은 최승희, 영화는 문예봉, 연극은 김선영이라고 불릴 정도로 북한 연극계의 대표 배우였다.
김정일의 총애를 받은 백인준의 1970년대는 더욱 화려했다. 불후의 고전적 명작을 비롯해 소위 김일성이 등장하는 수령 형상화 영화를 만드는 백두산 창작단의 단장이었다. 또한 우리로 치면 국회에 해당하는 최고 인민회의 부의장과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위원장을 역임했고 김일성계관(김일성상 수상) 작가이며, 인민상 수상작가, 문화계의 첫 노력영웅 칭호를 받은 북한에서는 대문호로 불리는 인물로 대우받았다. 그리고 <꽃 파는 처녀>를 비롯해 <누리에 붙는 불>, <민족의 태양>, <푸른 소나무>, <려명>, <친위 전사>, <성장의 길에서> 등의 시나리오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