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이야기 10.
영화감상이 일이 아닌 이상 영화를 혼자 보는 경우는 많지 않다. 친구 혹은 연인과 함께 영화를 보게 되는데, 보통 카페가 약속 장소가 된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는 카페에 앉아 영화에 관한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한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카페는 사람을 만나는 중요한 장소이다. 그곳에서 시나리오 작가는 작품을 구상하고 작성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카페는 영화의 단골 소재가 되기도 한다. 예컨대 짐 자무쉬가 만든 <커피와 담배>(2003)에서는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카페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퍼시 아들론 감독의 <바그다드 카페>(1987) 같은 경우는 여러 다양한 부류의 사람이 만나는 장소로 카페가 제시되어 있다.
영화와 카페가 일찍부터 아주 친하다 보니 영화인들이 직접 카페를 경영하는 경우도 많았다. 영화 <밀정>(2016)을 보면 영화 속에서 정보가 오가는 장소로 카페 카카듀가 나온다. 카카듀는 1928년 9월에 지금의 안국동 로터리에서 인사동길로 가는 초입에 들어선 서양식 건물 1층에 문을 열었다. 이곳을 세운 사람은 1924년 <심청전>으로 감독 데뷔를 한, 당대 유명 영화감독 이경손이었다.
이경손이 카페 이름을 카카듀라 지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카카듀라는 이름은 앵무새라는 뜻으로 하와이에서 볼 수 있는 머리에 긴 술이 달린 앵무새를 지칭한다. 이경손과 함께 카페를 낸 사람이 이경손의 사촌 조카인 미스 현이라는 사람이었는데 하와이에서 태어난 미국 국적의 한국인이었다. 그래서 하와이에서 온 미스 현 때문에 그 이름을 카카듀라 지었을 수 있다. 보다 그럴듯한 이야기는 오스트리아의 극작가 아르투어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의 희곡 「푸른 앵무새」(Der grüne Kakadu)에서 프랑스혁명 당시 혁명가들이 경찰의 눈을 피해 몰래 만나던 장소가 카카듀라는 카페였기에 그렇게 지었다는 말도 있다.
영화감독과 하와이에서 온 여성이 운영하던 카페라고 하니 아주 특색이 있었다. 카카듀의 외관은 간판도 없이 붉은 박을 세 개 달아 놓았고 문을 열고 들어서면 카운터에는 노랗고 붉은색이 도는 머리칼의 묘령의 여인, 미스 현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테이블마다 촛불이 켜져 있고 인테리어는 인도풍으로 해 두고 벽면에는 봉산탈춤에 사용되는 탈을 달아 두어 이채를 띠었다. 카페 한 구석에는 영화감독 이경손이 글을 쓰고 있었는데 카페에 손님이 많을 때는 직접 커피도 내리고 서빙도 했다.
카페는 당시 문화공간이기도 했다. 카카듀에서는 개점 기념으로 예술 포스터 전람회를 무료로 열기도 하였고, 톨스토이 탄생 백주년을 기념하여 외국문학연구회 동인들이 모여 간담회와 좌담회를 진행하기도 했다.
개점 이후 장안에 큰 화재가 되었던 카카듀는 개업한 지 불과 1년이 못 되 문을 닫았다. 사실 이경손과 미스 현이 카카듀라는 카페를 연 것은 돈을 벌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하와이에서 온 미스 현은 미국 공산당의 멤버였고, 그의 아버지 현순은 상해 임시정부와 관련이 있었다. 미국에서 조선으로 파견된 미스 현은 국내 활동을 원활하게 전개하기 위해 또래이자 당숙뻘 되는 이경손과 동업으로 카페를 연 것이었다. 서울에서 합법적으로 활동하기 위한 위장술이었다.
식민지 치하에서 탈출을 꿈꾸고 있던 이경손은 상해 임시정부의 소식을 미스 현을 통해 들었고 미스 현은 영화감독으로 보다 자유로운 이경손을 통해 조선과 만주의 독립운동가들과 접선을 했다. 이경손은 자신이 만든 필름을 들고 순회공연을 다닌다면서 만주로 건너가 봉천에서 대련으로 이동해가며 공연을 펼쳤다. 이 둘은 상해로 가기로 하고 대련에서 공연 채무를 받아야 한다며 만주로 떠났으나 뒤를 쫓는 밀정들로 인해 상해로 탈출하지 못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오기도 했다. 결국 활동이 여의치 않자 미국 국적이던 미스 현은 너무 쉽게 상해로 가게 되고 이경손은 시간이 좀 지나서 상해의 영화계에서 활동하던 정기탁의 주선으로 여권과 비자를 받아 상해로 가게 된다.
이경손과 미스 현의 상해 생활은 엇갈린 듯했다. 미스 현은 어린 아들이 살고 있는 미국으로 돌아간 사이 이경손이 상해에 왔다. 그는 상해에 남아 영화를 연출하고 상해 임시정부와 관련한 활동을 전개하다가 1차 상해사변이 일어나던 1931년 태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리고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태국에서 생을 마치게 된다.
미국으로 돌아간 미스 현은 그곳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던 중 해방이 되어 미군정청 군속으로 조국에 돌아오게 된다. 미군 통역관으로 활동하던 그녀는 상해에서 친하게 지내던 여운형이나 박헌영 같은 국내 공산주의자들과 계속 관계를 지속한다. 하지만 미군정에서는 그녀가 공산주의자들과 친하다는 이유로 해고하게 되고 미국으로 돌아온 미스 현은 북한으로 망명을 추진하여 결국 북한으로 돌아가게 된다.
미스 현에 관한 마지막 기록은 휴전 직후에 나타나게 된다. 전쟁이 끝나자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남로당계 공산주의자들의 재판이 열렸고 이들은 미국의 간첩으로 활약했다는 이유로 사형 언도를 받는다. 이들의 재판에서 미제국주의자들과 접촉할 때 그 접선자로 미스 현, 다시 말해 현앨리스의 이름이 등장한다. 공산주의 운동에 평생 헌신했던 그녀는 힘들게 찾아 간 고국에서 스파이라는 혐의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