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이야기 17.
동양극장에서 공연된 작품 중에 가장 인기 있었던 작품은 한국연극 역사상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작품이기도 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1936)이다. 이 작품은 원래 예정된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냉방시설이 좋지 않던 시절인지라 여름철 극장은 텅텅 비는 날이 많았다. 동양극장에서는 관객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황진이>를 공연하면서 무대에 박연폭포를 만들어 양수기를 이용해 물이 쏟아지게 만들어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황진이>의 성공으로 다음 작품도 사극을 선택하여 춘원 이광수 원작의 <단종애사>를 각색해 무대에 올렸다. 이 작품도 공연 첫 날부터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돌연 이왕직에서 공연중지를 요청해 왔다. 조선왕실을 모욕했다는 이유였다. 말이 요청이지 명령이나 마찬가지였기에 공연은 갑자기 중단 될 수 밖에 없었다. 연출 책임자인 박진은 마땅한 작품이 없어 고민하다가 신인 극작가 임선규가 얼마전 경성방송국에서 방송된 라디오 드라마를 위해 썼던 작품이 생각나 캐비넷에 던져두었던 원고를 꺼내 다시 읽어 보았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너무 신파적이긴 했어도 그럭저럭 쓸만 했다. 그렇게 무대에 올려진 작품이 바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였다.
이 작품은 어마어마한 흥행성적을 만들어냈다. 서대문일대에는 이 연극을 구경하기 위해 모인 사람으로 도로가 마비되었고 기마순경들이 총동원이 되어 관객들을 정리했을 정도였다.
내용은 이렇다. 주인공 홍도(차홍녀 분)는 가난한 형편이라 오빠 철수(황철 분)를 공부시키기 위해 기생이 되었다. 오빠의 친구인 영호(심영 분)는 약혼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홍도를 사랑하게 되고 결국 이 둘은 영호 집안의 극렬한 반대에도 결혼을 올리게 된다. 결혼한 홍도는 시어머니(김선초 분)의 구박을 받으며 시집살이를 하고 남편 영호마저 중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결국 혼자 남겨진 홍도는 시집에서 쫓겨나게 된다. 유학생활 중이던 남편이 돌아오고 홍도는 오빠와 함께 남편을 만나러 가지만 그곳에는 남편의 전 약혼녀가 있었다. 오해와 울불이 폭발한 홍도는 약혼녀를 죽여 살인자가 된다. 그런 홍도를 순사인 오빠가 경찰서로 데리고 간다.
동양극장의 극작가 이서구는 홍도에게 오빠가 수갑을 채우는 장면에서 관객들의 눈물을 쏙 빼놓을 만한 노래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본인이 직접 가사를 쓰고 동양극장의 악단을 이끌던 김준영에게 작곡을 시켜 신인가수인 김영춘에게 부르게 했다. 이 노래가 바로 “홍도야 울지마라, 오빠가 있다”라는 가사로 유명한 "홍도야 울지마라"이다. 이 노래는 연극의 인기에 더해 공전의 히트를 했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얼마 후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당시 동양극장의 주요 관객들이 기생들이었다. 집안의 생계를 위해 웃음을 팔아야 했던 홍도의 비극적 삶이야 말로 동양극장의 주요 관객인 기생들 자신의 이야기였기에 다른 어떤 작품보다 크게 공감했다. 이 작품이 공연되는 동안 경성전기회사에서는 동양극장에서 공연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특별전차를 운영할 정도였고 동양극장의 무명 극작가인 임선규는 일약 조선의 가장 뛰어난 흥행작가로 대우받으며 극장측의 요청으로 속편을 의뢰 받게 된다.
사실 임선규의 성공에는 그를 성공의 길로 이끈 부인의 내조가 컸다. 임선규의 부인은 당시 조선 최고의 영화스타인 문예봉이었다. 1935년에서 1945년 까지 10년간 조선영화는 문예봉의 시대였다.
문예봉은 연극에 미친 아버지 때문에 어린 나이에 배우가 되었다. 아역 배우로 두각을 나타내던 그녀를 <아리랑>을 만들었던 나운규가 눈여겨보았다. 나운규는 <개화당이문>이라는 작품을 만들면서 아역 배우로 문예봉을 캐스팅하려 했지만 극단의 인기 배우인 문예봉이 극단을 떠나는 것에 대해 문수일이 반대하면서 영화출연이 무산되었다. 이후 나운규는 <임자 없는 나룻배>에 출연하였는데 자신의 딸 역으로 다시 문예봉을 캐스팅하고 싶다며 문수일을 설득해 드디어 문예봉이 영화에 등장시키게 된다. 그게 1932년이었다.
이규환 감독이 만든 <임자없는 나룻배>의 대성공으로 문예봉은 스타가 되었고 극단 운영을 위해 돈이 필요했던 아버지 문수일은 문예봉을 부잣집 후처로 시집보내려 했다. 이때 문예봉은 극단의 몰래 사랑을 나누고 있던 젊은 극작가 임선규와의 사이에 아이를 갖게 되었다. 문수일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임선규는 극단에서 쫓겨났다.
혼자 아이를 낳아 키우던 문예봉은 어느 날 아버지의 극단을 탈출하여 남편이 있는 곳으로 간다. 남편 임선규는 폐결핵으로 병상에 있었다. 어린 아이와 병든 남편을 건사하기 위해 그녀는 영화출연 요구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가 출연한 <춘향전>(1935)은 조선 최초의 토오키 영화였고 춘향 역을 맡은 문예봉은 이후 조선 최고 인기 배우가 된다. 가정을 돌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영화에 출연하였던 것이 역설적으로 1935년 이후 문예봉의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임선규의 건강은 빠르게 회복되어 극작을 시작했고 동양극장에 입사하게 된다. 그는 동양극장청춘좌의 최고 배우 황철과 차홍녀를 모델로 하여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썼다. 이게 초대박이 터졌고 임선규는 최고의 극작가로 대우받게 된다. 임선규의 성공에 그를 성공으로 이끈 부인 문예봉에 대한 칭찬이 끊이지 않게 된다.
남편을 출세시킨 문예봉의 인기는 더 올라갔다. 당시 모든 영화제작자들은 문예봉을 주인공으로 출연시키고 싶어했다. 이 시기 조선영화는 문예봉이 나오는 영화와 문예봉을 캐스팅하려다가 실패한 영화로 나뉠 정도였다. 예를 들어 영화 <수업료>는 부모가 일하러 다른 도시로 떠나고 병든 할머니와 함께 사는 아이가 일본인 선생님과 주변의 도움으로 밀린 수업료를 내는 내용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아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하러 나간 엄마를 기다리고 있다. 관객도 목이 빠져라 어머니가 언제 오는지를 기다린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돈을 벌러 간 엄마와 아빠가 등장하는데 엄마가 바로 문예봉이다. 관객은 문예봉이 등장하기를 2시간 가까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라도 출연시켜야 할 정도로 그녀의 인기는 흥행을 좌우할 정도였다.
대단한 인기를 구가했던 문예봉은 이 당시 일제가 원하던 여성상을 체화한 인물을 연기했다. 그 당시에는 양처현모라는 말을 썼는데, 남편을 군대에 보내고 후방에서 가정을 지키는 양처와 미래의 군인을 키우는 현모가 그 당시 일제가 바라던 그런 여성상이었다. 이 당시 영화 속에서 양처현모의 전형은 문예봉의 모습으로 이미지화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