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영화 이야기 30.
안성기나 송강호 같은 배우를 국민배우라고 부른다. 북한에서도 대중에게 사랑을 받거나 연기력을 인정받는 배우들이 있다. 3천만의 여배우라 불리던 문예봉도 그렇고, 최초의 예술영화 <내 고향>에서 주인공 역을 맡은 후 평생을 배우와 연출가로 살았던 유원준도 50년 이상 스크린 앞에 섰던 북한영화의 대표적인 배우이다. 개인적으로 북한 최고의 배우라 생각하는 김세영 배우는 북한의 대중들이 가장 좋아하는 배우였다. 김용린이나 정운모 같은 배우도 북한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다. 여기에 <도라지꽃>의 배우 오미란, <홍길동>의 이영호 등도 우리나라 식으로 이야기 하면 국민배우 급에 드는 배우이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북한에서도 배우들에 대해 관심이 많다. 인민배우나 공훈배우라는 명칭은 이들 인기 있는 배우들에게 주어지는 칭호이다. 이러한 칭호는 언제 처음 생겼을까?
배우들에게 주어지는 명예로운 칭호는 6.25전쟁 중에 민족예술을 발전시킨 뛰어난 무대 예술인들에게 “공훈배우”라는 칭호를 처음 주어지면서 시작되었다. 1952년 12월, 10명의 공훈배우가 선정이 되었다. 성악가 김완우, 류은경, 국악인 림소향, 안기옥, 정남희, 연극배우 박영신, 배용, 황철 영화배우로는 문예봉이 선정되었다. 그러니까 영화인 중에 처음으로 공훈배우 칭호를 받은 사람이 문예봉이었다.
인민배우라는 칭호는 조금 늦게 생겼다. 1955년 최초의 인민배우가 선정되었다, 국악인 정남희와 안기옥, 무용가 최승희, 연극인 황철이 최초의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 영화인으로는 1963년 박학이 최초의 인민배우가 되었다.
최초의 공훈배우 문예봉과 최초의 인민배우 박학은 어떤 활동을 펼쳤나? 전쟁기간 동안 문예봉은 북한의 여성계, 영화계를 대표해서 해외에 나가서 전쟁의 정당성과 북한 인민들의 헌신적인 노력을 홍보하는데 앞장섰다. 문예봉은 6.25전쟁 기 북한을 상징하는 얼굴이었다. 황철은 연극배우이면서 영화배우이기도 했다. 그는 전쟁 기간에 미군의 기총소사로 한쪽 팔을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수를 달고 무대에도 서고 영화에도 출연하면서 불굴의 의지 같은 것을 보여 주었다. 박학은 배우로 활동하다가 1961년부터 영화감독으로 전향했다. 그때 만들었던 <분계선 마을에서>가 인민상을 수상하는 등 북한 영화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 성과들을 바탕으로 1963년 2월 영화인으로는 처음으로 인민배우 칭호를 받게 된 것이다.
배우들에게 주어지는 공훈배우, 인민배우와 같은 칭호외에 다른 성원들, 예컨대 연출가나 촬영기사 등 스태프 등에게 주는 칭호도 있다. 처음에는 공훈배우, 인민배우라는 명칭을 스태프에게도 주었다. 그러던 중 1961년에 인민예술가 제도가 실시되면서 공훈예술가, 인민예술가라는 칭호가 생겨났다. 그리고 뛰어난 작품에 대해서는 인민상을 제정 시상하기 시작했다. 인민상은 과학기술 및 문학에술 부문의 특출난 작품들을 선정해서 수여했다. 영화중에 최초의 인민상 수상 작품이 박학이 연출한 <분계선 마을에서>이다. 그리고 작가들에게 주는 칭호도 있다. 김일성 계관인이라는 칭호가 바로 그것이다. 영화인 중에서는 백인준이 김일성 계관인이었다.
스탈린시대 때 소련에서는 사회주의권의 최고의 문학작품에 수여하던 “스탈린상”이 문학작품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인민상은 스탈린상의 북한 버전이다. 김일성 계관인이라는 것은 북한버전의 계관작가 칭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