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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언 Sep 19. 2021

무성영화시대 스타, 김연실

조선영화스타 김연실 1편


 1. 프롤로그      


2008년 3월,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1934년에 제작된 안종화 감독의 영화 <청춘의 십자로>를 발굴하여 세상에 공개했다. 애초 필름은 <장한몽>이라 적힌 낡은 캔 안에 들어 있었다. 해방 직후에 단성사를 경영했던 선친에게서 이 필름을 물려받았다는 소장자도 이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낡은 캔에 적혀 있는 대로라면 이 영화는 1925년 제작된 이경손 감독의 <장한몽>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최고령 한국영화의 연도는 1925년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필름을 꺼내 확인한 결과 이 영화는 <장한몽>이 아닌 1934년에 제작된 <청춘의 십자로>임이 밝혀졌다. <장한몽>이 아니어서 아쉽긴 했지만, 기존의 최고 한국영화인 <미몽>보다도 2년 전에 만들어진 뜻깊은 작품임은 분명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영화의 발굴로 인해 필름으로 확인할 수 있는 한국영화의 시대는 좀 더 넓어졌다.     


안종화 감독이 만든 이 영화는 필름이 발굴되어 다시 세상에 공개되기 전까지 한국영화사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한 작품이었다. 어떤 것이든 새로운 것이 등장하게 되면 옛것은 쇠락하기 마련인데 무성영화인 <청춘의 십자로>가 제작된 1934년은 영화관에서 토키영화들이 상영되던 시기였다. 토키영화가 등장하자 주목받는 것은 토키영화이지 낡고 한물간 무성영화가 아니었다. 안종화는 자신이 쓴 책에서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다고 기록했지만, 당대의 신문과 잡지에서는 이 영화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유행에 뒤쳐진 것이 다시 주목받기 위해서는 반전의 시간이 필요했다. <청춘의 십자로>는 그 반전의 시간을 기다려 세상에 다시 나타났다. <가족의 탄생>(2006)을 연출한 김태용 감독에 의해 재구성된 <청춘의 십자로>는 70여년의 시간이 지나 다시 스크린에 그 이미지들을 쏟아냈다. 이 이미지들은 이 영화가 처음 개봉되었던 1934년보다 더 많은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변사를 이용한 연행이라든지, 1930년대 서울의 풍경, 그동안 이름으로만 알 고 있었던 이원용, 신일선, 김연실과 같은 무성영화시대의 배우들의 모습은 지금의 관객들에게는 모두 새로운 발견이었다.     


깜찍한 외모의 주유소 점원 계순 역의 김연실은 <청춘의 십자로>에서 유독 눈이 가는 배우였다. 그녀는 1927년 나운규 감독의 <잘 있거라>로 데뷔하여 1930년대 중반까지 많은 수의 영화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 무성영화시기 조선영화를 대표하던 여배우였다. 그녀의 연기 이력은 해방 이후 재개되었는데 전쟁 전에는 남한영화에 출연했다가 전쟁 중 월북하여 이후에는 북한영화에 나왔다. 북한에서 그녀가 활동한 기간은 무려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이어져 있었다. 연기의 역사로 보아 빼놓을 수 없는 우리영화의 대표 배우이다.    

 

스크린 속 김연실을 확인하는 것은 한국영화사 속 활자로만 묘사된 인물이 책 밖으로 걸어 나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한국영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배우임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김연실의 모습을 확인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해방 전 그녀가 출연했던 영화들은 현재 필름이 남아있지 않으며 그녀가 출연한 북한영화는 남한의 영화관에서 볼 수 없었다. <청춘의 십자로>의 발굴은 남한의 관객들에게 김연실이라는 배우를 기억하게 만드는 중요한 계기였다.     

     

<아리랑>의 히로인 신일선이 호남의 부잣집 후처로 들어가면서 스크린을 떠나게 되었다. 신일선이 앉아 있었던 영화계의 왕좌에는 깜찍한 외모의 김연실이 앉게 되었다. 관객들은 새롭게 등장하여 일약 남성 팬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그녀에 대해 궁금한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신문과 잡지에 게재된 그녀에 관한 인터뷰 기사를 읽어 보아도 김연실에 대해 속 시원하게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출생지조차 신문과 잡지의 기사마다 평양과 수원으로 엇갈리게 기재되어 있기에 더더욱 그랬다. 당시의 팬들조차 그녀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없었던 것을 지금의 우리가 정확히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다만 여러 자료들을 비교하여 최대한 그녀의 삶을 복원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김연실은 1910년 12월 29일 평양에서 출생한 것으로 보인다. 위로 언니와 오빠가 한 명씩 있었고 밑으로 남동생이 한 명 있었다. 구한국시대 평안도 지역의 장관으로 있던 아버지 김연식(金璉植)이 노년을 보내기 위해 수원군 고장면 매탄리에 터를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연실은 평양에서 보통학교를 다니다가 수원으로 옮겨서 그곳에서 지냈다. 그러다 보니 평양과 수원 두 곳 모두 그녀에게 고향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김연실은 수원의 삼일여학교(현 매향여자정보고등학교)를 다니던 중 양친이 모두 세상을 떠나는 불행을 겪었다. 시집간 언니와 학생인 오빠에게 의지할 형편이 되지 못해 어린 동생과 함께 함경북도 경성의 숙부 집으로 갔다. 가난한 숙부 집에서 함께 살기도 쉽지 않았다. 숙부는 남으로 북으로 전국을 다니기만 할 뿐 가계를 책임지지 않았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했다. 15세 무렵부터 함경북도 경성에 있는 자혜병원의 간호부로 일하기 시작했다.     


김연실의 아름다운 미모는 어디에서나 빛났다. 병원에서 일하면서 항상 미소를 잃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그녀를 좋아했다. 얼마 후 병원의 어떤 젊은 의사가 그런 김연실의 모습에 빠져 열렬한 구애를 해왔다. 처음에는 웃어 넘겼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이의 마음이 진심으로 느껴졌다. 첫사랑이었다.     


둘의 사랑은 점점 커져갔고 어느새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다. 10달이 지나 아이가 태어났다. 의사인 애인은 학비를 지원해 줄 테니 아이를 두고 서울에 가서 공부를 더 하라고 했다. 학업을 마치면 결혼하자는 약속까지 했다. 평소 부모를 잃는 바람에 학업을 마칠 수 없었던 것이 아쉬웠던 김연실은 물질적인 후원을 해주겠다는 애인의 말을 믿고 서울로 가서 근화여학교(현 덕성여자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배움에 대한 갈증을 해소할 수 있던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일 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함경북도 경성에서 보내오던 생활비가 끊어졌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애인은 결혼 약속을 지키지 못하겠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김연실이 낳은 아이는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이 모든 것들은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았다.    

 

불행은 한꺼번에 찾아왔다. 시집간 언니는 독립운동에 뛰어든 남편을 잃고 고생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고 듬직한 기둥 같던 오빠 김학근 역시 단성사에서 변사를 하던 중 병을 얻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동생 김학성과 함께 덩그러니 남은 김연실은 졸지에 소녀가장이 되었다. 어린 동생을 두고 죽을 수도 없었다. 천애 고아가 된 어린 동생은 지켜야 할 남아 있는 유일한 혈육이었다.     

 

살던 집에서도 쫓겨나 막막했다. 어린 동생을 데리고 일거리를 찾아 거리를 떠돌았다. 밤이 되면 광화문 네거리에 있는 기념비각 아래에서 눈을 붙이기도 했다. 불행을 벗어날 탈출구를 찾아야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7ZZ-WyphCz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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