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스물아홉 겨울 즈음,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서른 되는 소감이 어때?”
솔직히 말해서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냥 똑같은 연말이었을 뿐. 서른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나 말고 주변 사람들의 유난 덕분이었다. 서른이 뭐라고 그렇게들 난리인지. 그래도 난 그 해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그때의 나도 ‘서른에 드디어 평생의 사랑을 만나게 된 건가?’라고 생각을 했다. 아무렇지 않다고 하면서도 어떤 특별한 일을 기대하고 있던 것이다.
평소 중국 영화나 중국 드라마를 좋아하는데 <겨우, 서른>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중국어 제목은 <三十而已>로 ‘而已’는 ‘~일 뿐이다’라는 뜻이다. 소개를 보니 서른을 맞는 세 여자들의 이야기라는데 나도 그 시절을 지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마침 배경이 상해라 (상해는 짧게나마 공부도 하고 추억이 많은 도시다.) 주저 없이 시작했다. 보통의 드라마들이 10화에서 20화 남짓 우리들을 아쉽게 한다면 이건 무려 43화짜리다. 아쉬울 틈이 없다. 사실 처음에 이렇게 긴 줄 알았으면 시작을 못했을 텐데 다행히 20화가 넘은 시점에 알아차렸다.. 언제 끝나.. 하면서 안 끝나기를 바라는 이상한 마음으로 봤다.
사랑은 평생으로 증명하는 것
구자와 중샤오친은 베스트 프렌드다. 그리고 왕만니까지 친해져 셋이 아주 돈독한 사이가 된다. 극 초반부에서는 부유한 구자 부부와 소박한 중샤오친 부부가 비교돼서 나온다. 구자의 남편 쉬환산은 언제나 다정한 남편이며 아이를 사랑하고 아내를 최고로 여기는 사람이다. 구자 부부는 초호화 아파트로 이사를 하고 사업도 확장을 한다. 아이도 너무너무 귀엽다. 사랑 넘치는 남편과 귀여운 아이와 좋은 집, 이 세 가지라면 부족할 게 뭐가 있을까. 구자는 아주 현명한 여자로 나온다. 남편 폭죽 회사의 실질적 관리자이며 선을 넘는 직원에게 품위 있게 선 그을 줄 알고 사업을 위해서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는, 닮고 싶은 사람이다.
반면 중샤오친의 남편 천위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내보다 물고기를 사랑하고 빨래도 본인 것만 하는 썩 좋아 보이지는 않는 사람이다. 심지어 이들 부부는 유산의 아픔까지 겪어야 했는데 천위는 아내의 아픔을 보듬어주지는 못할 망정 별 감정을 못 느끼는 것처럼 나온다. 중샤오친은 이 사건을 계기로 이혼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서로의 성격에 불만을 가지며 헤어지기로 한다.
이렇게 보면 당연히 구자의 부부가 행복해 보인다. 그런데....
쉬환산은 베이징으로 출장을 가서 어떤 여직원(린유유)과 함께 일을 하게 된다. 린유유는 구자와 다르게 자기를 속박하지 않고 자유롭게 해 주며 늘 웃게 해 준다. 잠시의 마음이었을 뿐, 상하이로 돌아오면 그녀를 만날 기회가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상하이로 돌아와서도 문득 그녀 생각이 나며 린유유의 sns를 자꾸 보며 미소 짓게 된다. 어느 날, 린유유가 베이징 생활을 정리하고 쉬환산을 찾아온다. 쉬환산은 가정을 깨고 싶은 생각도 아내를 배신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런데 혼자 낯선 도시에 온 여자가 신경 쓰인다. 잘해보려는 건 아니고 그녀를 안전하게만 해주고 싶다. 그러다가 호텔을 , 방을 얻어주게 된다. 몇 번의 만남이 있었고 넘어간 적도 있으나 쉬환산의 마음은 확실하다. 아내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것. 그런데 영원한 비밀은 없다. 결국 구자가 알게 되고 그들은 헤어질 수밖에 없다. 후회해봤자 구자의 마음은 상처뿐이고 돌이킬 수 없다.
중샤오친과 천위는 이혼을 했지만 집이 구해지지 않아 당분간 같이 생활하게 된다. 그 와중에 중샤오친은 회사에서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게 된다. 천위는 목숨을 걸고 그 일을 취재해 중샤오친의 결백함을 증명해준다. 중샤오친은 그 사이 회사 신입사원과 잠시 사귀기도 하였으나 너무 어린 그의 모습에 자꾸 천위가 생각난다. 그러던 어느 날, 술에 잔뜩 취한 천위가 진심을 말하게 되고 그 말에 중샤오친은 마음이 흔들리게 된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천위는 티 내지 않았을 뿐, 진심으로 중샤오친을 위하고 있었고 그저 묵묵히 옆을 지키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짬짬이 썼던 그녀의 이야기가 소설로 출간되고 큰돈을 벌게 된다.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기분 좋은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아무튼 그렇게 해피엔딩.
구자와 쉬환산의 10년은 조금도 불행하지 않았다. 마지막 둘의 대화에서도 우리 결혼 생활은 실패가 아니라 그저 끝난 것이라고 말한다. 그 10년 동안 너무 행복했었기 때문에 내리막길을 걷고 싶지 않다고 했다. 두 사람의 끝을 보며 많이 울었다. 누군가의 방황은 누군가에게 씻어낼 수 없는 상처가 되고 한 번 일어난 일인 이상 되돌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쉬환산의 마음도 그랬겠지. 내가 아내의 말을 들었더라면 회사도 건재할 것이고 보고 싶은 아들과 마음껏 놀아줄 수 있었을 텐데. 그러니까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쉽게 변하면 안 되는 거다.
사랑은 말로 고백하는 게 아니라 평생으로 증명하는 것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진심은 순간의 진심일 때가 빈번하다. 특히 “사랑해”라는 말. 그 말은 “(지금은 널) 사랑해. (하지만 변할 수도 있어.)”라고 생각한다. 마음을 말하고 싶다면 그저 평생 의리를 지키는 것. 그게 사랑이 아닐까.
산을 넘어야만 비로소 나를 만날 수 있다.
왕만니는 명품 매장의 직원이다. 그녀는 어떤 남자(량정센) 때문에 겪지 않아도 될 숱한 일들을 겪는다. 그 남자는 회사에서 보내준 크루즈 여행에서 만난 사람인데 만니를 사랑해주고 돈으로도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그녀는 그가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했으나 머지않아 그에게 아주 오래된 여자 친구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 일을 계기로 오랜 직장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간다. 도시에 적응된 만니에게 친절이 넘치는 고향은 부담스러웠으며 어디를 가도 감시를 당하는 것 같아 친구들이 있는 상해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미수금을 받아와야 하는 어려운 미션을 받게 되는데, 그 미션을 성공해야만 일하던 명품 매장에 돌아갈 수 있다. 만니는 멋지게 미션을 해내지만 유학을 떠나야겠다며 점장 자리를 거절한다. 그녀는 어려운 일을 해내며 스스로를 믿게 된 것이다. 보장된 자리보다 더 큰 것을 얻은 듯하다.
세 명은 모두 서른 살에 견뎌내기 조차 힘든 일들을 겪는다. 그런데 그녀들은 그 역경을 이겨내며 비로소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구자는 홀로 서며 차 공장을 일으키고 중샤오친은 성공한 소설가가 되며 가정을 되찾는다. 만니는 서른의 나이에 용기 있게 자신을 찾으러 떠난다. 너무 현실적이라 마음이 아픈 세 사람의 이야기다. 그리고 이겨내는 주인공들을 보며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서른에는 사랑을 만날 수도 있지만 잃을 수도 있는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나이다. 그리고 어떤 일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나이다. 서른을 이립(而立)이라고도 한다. 홀로 서는 나이. 마음이 확고해 흔들리지 않는 나이. 우린 그런 시절을 겪고 있고 겪어 냈다. 끝내기에 늦지 않았으며 시작하기에 늦지 않았다. 우린 겨우, 서른 일뿐인걸요.
주인공의 말들
-갈피를 못 잡는 나날들이 우리를 눈부시게 성장시키죠. 30살은 시간이 우리의 청춘을 조금 앗아간 나이일 뿐이에요. 하지만 우리에게 바꿀 수 없는 경험을 주죠. 사랑을 경험하게 해 주고 더 나은 삶을 추구할 동력을 줘요.
-인생은 아마 편도 여행일 거예요. 특정한 숫자가 우리가 앞을 향해 나아갈 속도와 멈출 순간을 정할 수 없어요.
-우리 모두가 ‘다만’이라는 용기를 갖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