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에 내 음악을 채우면 내 장소가 된다

by 박상하

방구석 스툴 위에 조그만 라디오를 놓았다. 어지간한 북셸프 스피커 하나보다도 작은, 티볼리 ‘모델 원’이다. 돌아가신 장인어른께서 남기신 물건이다. 어느 해 생신 때 아내가 선물했다. 음악을 썩 즐기지는 않으셨지만 곧잘 클래식 FM 채널을 틀어놓으시곤 했다. 댁에서는 전파가 약해 숨을 고른 후 주파수 다이얼을 아주 조심스럽게 맞추어야만 그 방송을 잡을 수 있었다. 묘하게도 강릉집에서도 그렇다. 서울에서 주파수 93.1MHz에서 나오던 클래식 FM이 강릉에서는 89.1MHz에서 나온다. 대개 프로그램들은 서울과 같지만 다른 몇몇 지역 방송이 신선하다. 특히 평일 오후 4시에 나오는 <재즈 카페>가 기다려진다(프로그램이 개편되어 지금은 오전 11시로 옮겼다). 서울 클래식 FM에서는 주말 자정에 이르러서야 선심 쓰듯 한 주 두 번뿐인 재즈 방송을 이곳에서는 매일 들을 수 있다. 강릉 시민들은 분명 서울 시민들보다 ‘재즈 감수성’이 높을 것이다.


티볼리의 외부 입력 단자에 휴대폰을 연결한다. 집에서 듣던 음악들이 흘러나온다.


클래식 음악 연주자가 주인공인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전 세계를 돌며 공연하는 사람이다. 바퀴 달린 트렁크를 끌고 호텔방에 들어선다. 짐을 풀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자신의 가족 사진과 그림 액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것이다. 이제 그 공간은 한동안 그의 집이 된다. 며칠 후 다른 도시를 방문하여 숙소가 바뀌면 그는 다시 액자를 늘어놓고서 새로운 공간을 자신의 집이라 선언할 것이다.


내가 듣던 음악도 그 음악이 흘러나오는 공간을 내 집으로 바꾸어준다. 새 공간 속에서 울리는 음악은 서울의 내 방에서 듣던 그 음악과 완전히 똑같은 음악은 아니다. 닮았지만 다르다. 머릿속 어떤 부분이 꿈틀거린다. 이 방에 앉아 있는 나 역시 서울의 그 사람은 아닐는지 모른다.


어느 겨울날 강릉항 남대천변을 걸으러 나섰을 때였다. 해 지기 1시간 전의 싯누런 빛이 강 하구를 뒤덮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문을 여는데 재즈가 흘러나왔다. 도저히 차에서 일어설 수 없었다. 주저앉아 음악에 몸을 맡겼다. 어떤 곡이었는지는 떠오르지 않지만 무척 행복했던 기억만은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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