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9. 3학년
3학년 1학기 때 들었던 수업의 심화 수업을 수강신청했다. 이번엔 또 어떤 학기가 시작될까, 강의계획안을 읽자 또다시 산을 넘어야 할 것 같은 느낌에 착잡했다. 강의안을 일부 발췌해 왔다.
1. 교과목 개요
이 강좌는 미술의 긴 역사 속에서 견고히 자리한 '회화'라는 형식과 그 확장성을 실험하는 한편,
각 개인의 삶의 경험이나 사유의 깊이, 지적 넓이등을 오가는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것을 훈련하고자 합니다.
2. 교과목표
강의실은 지식생산의 장이며, 작업장이자 실험실이어야 하며, 무엇보다 논쟁의 장이어야 합니다.
수강생들의 끈기 있는 실천과 적극적인 실패를 기대합니다.
그러게요, 교수님.
저는 또 얼마나 많은 실천과 적극적인 실패를 경험하게 될까요?
머리만 커서, 자꾸 실패를 피해 가려한다
항상 고심하느라 작업 전 시간을 보낸 것에 비해, 초반에 에스키스를 그려나가는 것이 이전 학기보다 수월했다. 머리만 쥐어짜고 있는 것보다 일단 그려야 진도가 나간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일까. 그리고 양으로 승부를 보는 게 학교 과제에서 높은 성적을 받는 것에 꽤나 도움이 된다는 걸 짬으로 알아차렸다. 캔버스 1개를 중간 과제로 내는 것보단, 열심히 고민한 흔적으로 2~3개를 그려가면 뭐가 되었든 간에 교수님이 노력 점수를 주실 가능성이 크다. '노력상', 젠틀하게도 나는 그것을 노렸다. 이전 학기 때와 동일하게 물감을 무턱대고 캔버스에 찍어 바른 뒤, 테레핀을 부어 색들끼리 섞어가는 작업을 이어나갔다. 작품의 크기가 커졌고 에스키스의 수도 많아졌다. 이 정도면 열심히 하고 있는 티가 나겠지?라고 생각한 나의 기대와는 달리, 저번 학기부터 나의 작업을 이어서 보시던 교수님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날카롭게 지적하셨다.
'연구를 하나씩 차근차근해나가야지, 계속 뭔가 효율성을 찾는 느낌이네.'
머리가 암만 크고 꼼수로 가득 찼어도, 교수님을 당해낼 순 없다. 독심술을 하시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내 마음을 잘 알고 계신다. 아니, 어쩌면 내 마음이 그림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걸까?
'네가 앞으로 어떤 회화를 계속해가고 싶은 건지를 찾는 과정이니까 당연히 이번 학기에 결론이 팍팍 나지 않을 거야. 근데 이 답일까, 저 답일 까만 찔러본다고 해서 답이 나오는 게 아니야. 도전을 할 거면 제대로 해.'
교수님의 말에 침묵하면 정말 주제성 없이 작업하는 사람처럼 보일까 싫었다. '그게..' 하면서 뭐라도 내 작업을 설명해 볼까 했으나 말이 길어지자 교수님은 단칼에 잘라내셨다.
'변명하지 말고. 네가 정말 구현해내고 싶은 게 뭐였는지 생각을 다시 해봐야 할 것 같아.'
'... 네, 알겠습니다.'
'너한테 너무 숙제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작업이...'
그 말을 남기시곤, 그대로 나가셨다. 작업과 나만 덩그러니 실기실에 남았다.
교수님의 그 말이 왜 이렇게 마음에 남을까? 숙제처럼 작업하지 않는 게 어떤 모습인 건지 이젠 모르겠다.
실패는 고통스럽지만, 때론 실패로 인해 스프링처럼 튀어 오른다
또다시 같은 질문에 부딪혔다. 편하게 가고자 하면 보이기 위한 그림이 되고, 고민해서 그리면 너무나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게 된다. 그 시행착오를 피해 가고자 했고, 한 학기마다 완결성 있는 작품을 내려고 했다. 조금 도전해 보고, 이 정도 발전했습니다. 그게 한 학기마다의 목표가 되다 보니 '그래서 네가 뭘 원했는데?'에서 말문이 막힌다. 변화 과정만 보여주고자 했지 표현하고자 하는 바는 없다. 학기의 성적이 장학금의 여부에 큰 영향을 주다 보니, 더 안전하게 가려고 했던 게 맞다.
많은 실천과 적극적인 실패
그것이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회화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면, 어떤 실천을 보여줄 것이냐가 아닌 어떤 것을 추구하고자 하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물감을 쌓아 입체감을 주고자 했던 거라면, 더 분명하게 입체감을 줘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불가피하게 수많은 실패들을 경험해야 한다. 그걸 해야 내가 원하는 회화 방향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구더기가 무서워 장을 못 담그는 것이 맞다, 항상 그래왔다.
적극적인 실패를 피했던 건, 각각의 실패가 너무 아팠기 때문이다.
실패가 어떻게 익숙해질까? 실패에는 면역이 없다.
무너져 내리면 아프고,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하면 슬프고, 인정을 받지 못하면 괴롭다.
한번 실패가 영원한 실패가 될 것만 같아 꼼짝할 수 없을 만큼 두렵다.
난 그 실패에 대한 공포가 너무 커서, 한번 망하고 말지 뭐 그 자세를 취할 생각도 못했다. 더 안전하게, 이 정도면 괜찮겠지 싶을 정도로만..
그렇지만 실패가 꼭 나쁜 건 아니잖아, 교과목표에도 '적극적인 실패'가 적혀있는데.
실패가 너무 싫은 안전추구형이었던 나의 안전핀이 뽑혔다. 변명하지 말라는 교수님의 말에 얼굴이 벌게지면서 수치심이 들었다. 안전함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저 멀리 밀어놨던 이판사판의 마음이 올라왔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나는 피할 수 없는 실패를 두 팔 벌려 맞이하겠다.
작업을 바라보며 조용히 눈을 번뜩였다.
생각해 보면 실패는 늘 무서웠지만, 실패는 날 강하게 만들었다.
정말 뻔하고 형식적인 말이지만 실상이 그렇다. 예고 입시에서 실패한 경험 때문에 1년을 겁에 질려 그림에 손도 대지 않았지만, 한편으로 더 굳세게 대학 입시를 준비했다. 2학년 때 입시 그림 같아 재미없다는 평을 들었지만, 끝을 보자는 마음으로 드로잉만 160장을 그려냈고 교수님께 인정을 받기도 했다.
난 쉽게 겁에 질리는 사람이지만 쉽게 포기하는 사람은 아니며,
실패가 너무 두렵다가도 어느 순간 스프링처럼 튀어올라 결과를 내는 사람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뭐든 해볼 용기가 생겼다.
이판사판, 망하든 말든 도전해 봐.
겁이 없어진 나는 물감을 찍는 것에서 벗어나서, 캔버스 천 자체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캔버스 천을 마구잡이로 구기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 그러자 평면도 아니고 입체도 아닌 기묘한 그림들이 완성되었다. 한눈에 봤을 때 그림에서 느껴지는 입체감이 그림인 건지 실제인 건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측면으로 보면 한눈에 캔버스 자체에 입체감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 부분이 재밌게 느껴졌다. 재밌게 느껴지자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일어났다. 그 마음이 그림에도 그대로 드러났는지 오랜만에 내 작업을 본 교수님은 깔깔 웃으셨다. 옆에서 같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엄청 패기 있네, 사실 네 성격이 원래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 말에 나도 그제야 편안하게 깔깔 웃었다. 내 눈에도 내가 그래 보였다.
변명하는 것보단, 패기 있는 편이 훨 나 다웠다.
그게 때로는 실패를 수반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