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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희 Oct 29. 2024

실기실 속 삶의 현장

episode 8. 야작에 관하여

작업실을 갖는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이에 대해선 아마 많은 사람들이 로망을 갖고 있을 같다. 재료들을 펼쳐놓고, 캔버스를 쌓아두고, 노래를 틀고 흥얼거리다가 영감이 떠오르면 캔버스 앞에 서서 붓질을 하는.. 나는 그런 모습을 상상하곤 했었다. 아늑하고, 따뜻한 분위기.. 그리고 그 속에서 그림을 그리는 나...


'모퉁이 하나'의 작업 공간. 캔버스에 둘러쌓이면 발 디딜 틈도 없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미대에서의 작업실은 '벽 하나', '모퉁이 하나'였다. 1학년 땐 작업 공간이 주어지지 않았고 2학년 때부턴 벽 하나를, 3학년 땐 두 벽면을 쓸 수 있는 모퉁이 하나의 작업 공간을 얻었다. 처음으로 생긴 작업 공간에, 학기 초엔 드로잉을 붙여놓기도 하고 캔버스를 걸어두기도 하면서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점차 작업 수가 많아지면서 작품을 둘 곳이 없자, 도대체 학교는 등록금을 어디에 쓰는 거냐며 툴툴거리고선 캔버스를 들고 복도로 나가기도 했다. 차가운 복도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앉곤, 복도 벽에 작품을 기대어 두고선 그림을 그렸다. 그것이 하나의 문화처럼 자리 잡아서 다들 두꺼운 담요를 두르고선 차디찬 복도로 나와 그림을 그리곤 했다. 복도에 나온 학생들끼리 서로 작업을 봐주기도 하고,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니 재밌는 풍경이다.



실기실은 집이나 다름없다


실기실의 존재는 의미가 너무나도 컸다. 미대생에게 실기실이란 작업만 하는 공간이 아니라는 걸 깨닫기까진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선배들이 물감이 덕지덕지 묻은 앞치마를 매고, 퀭한 표정으로 수건을 목에 두른 채 복도를 걸어가는 것을 보며 '왜 선배들은 학교에서 밤을 새우는 걸까?' 싶었다. 하지만 그 모습은 놀랍지도 않을 속도로, 금세 나의 모습이 되었다. 


전공을 3과목 들으면, 각 전공당 중간 과제 1개, 기말 과제 1개씩 제출한다고 할 때 최소 6개의 작품을 한 학기에 그려낸다. 전공 수업 및 교양 수업을 들으면 금세 반나절이 지나가고, 알바를 하거나 동아리 활동을 하면 저녁 시간도 물에 씻기는 솜사탕마냥 사라져서 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저녁 ~ 새벽만 남는다. 게다가 실기실에 재료가 다 있기 때문에 학교에서 그림을 그려야 하고, 그러다 보면 실기실에서 밤을 새우게 되는 것이다. 그림 그리고, 먹고, 잠자고, 씻을 수도 있는 곳. 어쩌면 집보다 많은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특히 라꾸라꾸의 존재는 실기실 생활에서 아주 중요했다. 라꾸라꾸는 작은 접이식 침대인데, 처음 봤을 땐 좁고 불편해 보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진가를 알게 되었다. 감성 있는 파란 줄무늬에 각도 조절까지 되는 라꾸라꾸에는 항상 전날 밤을 새운 학생들이 죽은 듯 누워 잠을 잤다. 그러다 비어 있는 라꾸라꾸를 보게 되면, 나도 헐레벌떡 달려가 그 위에 몸을 뉘었다. 눕자마자 찾아오는 나른함, 그리고 안락함.. 머리가 라꾸라꾸에 닿고 5분이 지나면 그렇게도 깊게 잠이 들었다. 손에 진동으로 알람을 맞춰놓은 핸드폰을 꼭 쥐고 그렇게 잠에 들었다. 때로는 그 위에서 달콤한 꿈도 꾸었다. 그리고 어느 때는 잔 줄도 모르고 그대로 잠들었다가 핸드폰 진동에 깜짝 놀라 깨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피곤했길래 그렇게 단잠을 잤을까 싶기도 하다. 


이 정도면 정말 아늑한 잠자리가 아닐 수 없다



극한의 피곤함은 공포를 넘긴다


실기실엔 유명한 괴담 하나가 있었다. 계단 대신 각 층을 연결하는 오르막길이 있었는데, 밤이 되면 그 오르막길에서 쿵, 쿵 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거꾸로 뒤집힌 한 처녀 귀신이 머리를 찧어가며 그 오르막길을 내려온다는 것이다(지금 상상해 보니 정말 끔찍하다). 쿵, 쿵 거리며 바닥에 머리를 찧고, 뚝뚝 흐르는 핏자국을 남기며 조금씩 우리가 있는 실기실을 향해 다가온다.. 그리고 어떤 학생은 새벽에 실제로 그 실루엣을 봤다고 하여 공포가 극에 달했다.


'뭐 진짜? 악 너무 무서워!'


그렇게 말했던 겁 많은 나는 그럼에도 귀신이 나오는 것과 실기실에서 자는 것은 별개의 일이라는 듯 꼬박꼬박 실기실에서 눈을 붙였다. 그리고 씻기 위해 오르막길을 내려가며 샤워실 쪽을 향했는데, 그러다 짧게 위층에서 한 번의 '쿵' 하는 소리를 듣게 됐다. 그제야 '아 여기에 귀신이 내려온다고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컴컴한 복도가 눈에 들어오고 신경이 곤두서며 오싹해졌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그게 뭐가 중요한가, 졸려서 눈도 안 떠지는데. 정말 졸려서 오르막길에서 누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판에 귀신은 무슨. 길게 하품을 한번 내지르고선 반쯤 눈을 감고 샤워실을 향해 갔다. 어쩌면 '쿵' 하는 소리는 귀신이 아니라 밤새 야작한 미대생이 샤워실 가는 소리가 아니었을까? 그게 무서웠다. 


한 번은 도저히 졸려서 안 되겠다며 실기실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잘 준비를 하는데, 선배가 어제 정말 끔찍한 일이 있었다며 입을 열었다. 


'있잖아, 어제 여기 실기실에서 엄청 큰 바퀴벌레 나왔다잖아. 근데 못 잡았대.'


엄청 큰 바퀴벌레라. 바퀴벌레 정말 싫었다. 실기실 공기가 차가워 담요를 코까지 덮은 내가 중얼거렸다.


'아 진짜 싫고 무섭..'


정말 놀랍게도 그대로 잠에 들었다. 말도 끝나기가 전에, 아주 큰 바퀴벌레가 내가 잠들 이 주변에서 도사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대로 잠에 들어 버린 것이다. 겨우 돗자리 하나에 몸을 의지한 채, 바닥이 마치 안락한 침대라도 되는 냥... 따사로운 햇살에 눈을 뜨고 나서야 화들짝 놀랐다. 혹시 자고 있는 사이에 내 주변에 왔다 갔다 한 건 아니겠지? 그건 정말 싫다. 하지만 결국 끝끝내 그 바퀴벌레를 잡지 못했다는 게 더 무섭다.


어떻게 그려나가야 할까 고민하고, 밤새 그림을 그리면서 생기는 극한의 피곤함은 의도치 않게 나를 용감하게 만들었다. 귀신이 나오는 오르막길을 터벅터벅 걸어 올라가고, 엄청 큰 바퀴벌레가 나오는 바닥 위에 돗자리를 깔고 눕고, 그 모든 걸 가능하게 했다. 정말 피곤했다. 너무 피곤해서 피곤함이 공포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웃기기도 했다. 반 시체처럼 자고 있다가 벌떡 일어나서 오전 수업을 들으러 갔던 것이나, 오늘은 밤새서 그릴 거라 힘들테니 저녁밥이라도 든든히 먹자며 동기와 피자를 시켜먹었던 것이나, 복도 바닥이 너무 차가워서 올 잠도 쫓아내는 것 같다며 낄낄거리던 것들 모두... 이젠 너무 소중한 추억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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