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야? "
"저요. 지하철이요. 가고 있어요"
"그래 그러면 지하철 역 너 나오면 태워서 같이 갈까? "
"아니에요. 지도 보니까 조금만 걸어가면 될 거 같아요. 먼저 가 계세요. "
"그렇게 말할 줄 알고 나는 이미 주차장에 있단다 하하하. "
"하하 하하 하하."
"미안... "
"가서 봐요. "
"준경아. 너 목소리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지? 컨디션에 차질이 생기면 안 된다. 여기 이 코트 주말에 잡기 정말 어려운 거 알지? 내가 그 앱을 5분마다 새로고침 해서 겨우 잡았다. 그러니 우리 제대로 뽕 뽑아보자."
테린이 대회 입상을 위해선 지금까지 패턴으로는 실력이 늘지 않는다라는 것이 재현이 형의 지론이었다.
"야. 우리가 맨날 치는 사람들하고 쳐서 늘지 않아. 어차피 클럽에서 잘 치는 형들은 자기끼리 치고, 우리는 한 달에 한 번 그 형들이랑 칠 기회가 있냐? "
"그건 그래요. 그리고 그 형들이랑 치면 또 잘 쳐야한다는 압박에 시달려서, 평소보다 더 못치고 그러면 그 형들 또 얼굴 표정 바뀌고. 아 스트레스 받아요. "
"그래. 맞아. 그래서 내가 이런 고민이 있다고 했는데 내 친구 중에 하나가 요즘 사람들은 앱으로 만나서 테니스 벙개한다는 거야. "
"벙개가 뭐에요? "
"아... 그런게 있어. 벙개는. 뭐 됐고. 여튼 사람들은 앱으로 서로 모여서 친대. 우리도 그거 해보자. 모르는 사람들이랑 쳐봐야 실력이 는다잖아. "
클럽에서 저 말이 바로 지난주에 나왔었다. 지난주 토요일에는 월례대회가 있었는데 거기서 또 꼴찌를 한 나에게 진아 누나가 나에게 위로를 해줬었다.
"준경아 모르는 사람이랑 많이 쳐봐. 난도 요새 모르는 사람들이랑 어케저케 만나서 치는데 그러니까 실력이 좀 더 느는 거 같애. 여기서는 매번 같은 사람이랑 치니까 대충 저 사람의 공이 다음에 어떻게 오는 지 예측도 되잖아. "
"준경. 걱정하지마. 형이 이미 알아보고 있다. 안 그래도 다음주 일요일에 운좋게 내가 하나 일정 찾았는데 거기 같이 가자. "
"저요? 제가 꼭 가야해요? "
"너 나랑 페어잖아. 우리는 대회 입상할 때까지 끝까지 가는 거야. 일요일에 구일역으로 와 알았지? "
지금에야 월례대회가 편해졌지만, 처음에 클럽에 들어가서 월례대회라고 하기에 겁이 났었다. 무슨 상금도 있고, 등수도 나온다는 거 같은데 주위에 테니스 치는 사람도 없고, 운동하는 클럽이라는 곳도 처음 들어가봐서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클럽에 꽂아준 코치님이 코트 밖에서 잠깐 담배 피울 때 가서 넌지시 물어봤다.
"코치님 이거 모의고사 같은 거에요? 못하고 그러면 클럽에서 잘리나요? "
"오. 준경. 월례대회? 그거. 그렇취이~ 2개월 연속으로 꼴찌하면 경고받고 4개월 연속으로 꼴찌하면 잘릴 걸? "
"와 어떻게 들어왔는데 또 나가라 그래요? 테니스 무섭네. "
"테니스 만만하게 아니야. 열심히 해야해. 알았지? 화이팅이다. 레슨 시간 좀 더 추가할까? "
"아니에요. 그냥 제가 열심히 할께요. "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첫 월례대회 끝나고 뒷풀이 할 때 꼴찌를 한 나는 술먹다가 살짝 울면서 사람들에게 열심히 할테니 저 자르지 말아달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웃으면서 난리가 났었다. 코트에서 폭력이나 절도, 아니면 상대방에 대한 욕설 등 도덕적이나 법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일을 저지르지 않는 한 사람을 거의 자르지 않는다고. 그 때 옆에서 나를 보며 배를 잡고 웃었던 코치님을 보며 다시 한 번 테니스 판에 믿을 사람이 없다라는 걸 깨달았다.
결국 지난주에 잡힌 이 주말 테니스 일정 때문에 금요일 늦게까지 카페에서 노트북으로 작업을 다 끝내고 이메일 발송 버튼을 눌렀었다. 초짜인 나를 위해서인지 이번 TF에서 해야할 것은 크게 어렵지 않은 내용이었다. 인수대상 기업의 재무정보를 찾아 작성하는 건데, 스마트하신 그 분이 템플릿을 미리 작성해놨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채워넣을 수 있었다.
'그래도 그 분 덕분에 금요일에 다 끝내고 어제랑 오늘 테니스 치는 거네. 나중에 뵈면 커피라도 한 잔 드려야겠다. '
금요일에 했던 작업물과 무슨 커피를 사줘야 하나 생각을 하며 걷다가 나에게 손을 흔들고 있는 재현이 형을 발견했다. 저 형은 키가 작은데 이상하게 눈의 잘 띄인다. 모자를 늘 흰 색을 써서 그런가. 거기에 깔맞춤으로 흰 색 반바지와 흰 색 신발 까지 맞춰서 그런지.
"준경. 오늘 빡겜할 준비는 되었는가? "
"오늘 4시간이라면서요. 그럼 당연히 빡겜이겠죠. "
"그렇지. 근데 나도 알고보니 이 사람들 우리 동네에서 치는 사람들이네. 혹시 너 바이브 클럽이라고 들어봤어? 테린이 클럽이라던데. "
들어본 이름 같은데. 진아 누나가 모르는 사람들이랑 쳐봤다고 한 게 그 클럽 같은데.
"들어본 거 같기도 해요. 우리 클럽에서 누가 쳐봤다던데. "
"아. 그래? 난 니가 모를 줄 알고 얘기한 건데. 오늘 4시간이잖아. 그래서 사람이 4명으로는 너무 힘드니까 사람이 더 많나봐. 남자 4에 여자 4인지 아니면 남자 6에 여자 2명일지 모르겠어. "
"에이. 남4에 여4이겠죠. 그래야 남복도 돌고, 여복도 돌아가니까요. 물론 중간에 혼복도 섞겠지만. "
"그렇지. 그 바이브에 잘 치는 사람들이 꽤 많다고 하네. 20~30대가 주력이고, 운동 신경 좋은 사람들이 많아서 테린이 클럽이지만 다들 잘 친다고 하네. "
"형은 운동 신경이 좋지 않으니 가입 못하겠네요. 하하하. "
재현이 형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이 아저씨 은근히 아니 대놓고 정색을 잘해서 중간 중간 곤란해질 때가 있다. 대회 때에도 우리 공이 애매하게 떨어지면 상대방이 아웃을 외치는 경우가 많은데 그 때마다 정색하고 인이라고 해서 분위기가 어색해질 때가 있다. 테린이들 대회라 뭐 서로 상황보며 정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클럽 사람들 말로는 이 라인 시비 때문에 전국대회 이런 데서는 싸움이 나기도 한다고 하니, 재현이 형은 분명 싸움에 휘말릴게 분명하다.
"가입할 수도 있겠네요 하하하... 빨리 들어가시죠 형. "
재현이 형이 어렵게 잡은 이 주말 일정은 우리가 늘 치던 코트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파이썬 클럽이 있는 코트는 실외에 있는데 이 곳은 건물 하나가 테니스 코트와 관련 시설로 채워져 있었다. 그것도 6층인지 7층인지 되는 건물에 코트 층이 2개나 있었고, 주차장에서 바로 엘레베이터로 올라가는 것까지. 비가 오거나 한여름이나 한겨울에 실외에서 치는 게 너무 어려운데 이런 실내코트라면 얼마나 좋을까.
"형 여기 뭐에요? 왜 이렇게 좋아요? 이런 데 대관하면 1년 내내 테니스 치러 올 거 같은데요. 와 너무 좋다. "
"여기서 1년 매일매일 테니스 치려면, 내가 니 연봉을 정확히 모르지만 연봉에서 최소 10%에서 15%는 날라갈지도 몰라. "
"에이 설마. "
"오늘 내가 니 것까지 내줘서 여기가 얼만지 모르구나. 너랑 나랑 2시간 2명 참여해서 내가 7만원 보냈다. 인당 3만 5천원이야 2시간에 "
와. 3만 5천원. 만약 한달에 4번을 여기서 2시간 치면 14만원이라는 소리인데 그러면 한 달 레슨비보다 조금 싼 가격이다. 실제 나가서 모르는 사람이랑 쳐보는게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 게 맞지만 레슨 받고 여기서 주말에 1번씩만 쳐도 한달에 30만원이 넘으니.
예전엔 테니스가 시간 많은 백수가 제일 실력이 많이 는다고 했는데 요즘은 바뀌었다고 누가 클럽에서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시간많고 돈도 많은 백수가 테니스 실력이 는다고. 그런데 시간많고 돈이 많으면 그게 백수인가, 건물주인가 나도 잘 모르겠다. 건물주 되면 나도 실력이 빨리 늘까. 흠 그러면 테린이 대회 우승을. 아니 건물주 되면 테니스 꼭 쳐야하나.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엘레베이터가 멈추면서 우리가 만나기로 한 코트가 있는 층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마자 들리는 테니스 공 타구음. 사람들이 급격하게 몸을 움직일 때마다 나는 신발에서 들리는 끽끽 소리. 포인트가 끝날 때마다 들리는 "나이스 파트너". 새로운 곳에서 모르는 사람들이랑 치는 테니스라니 약간 설레었다.
"안녕하세요. 앱으로 신청하신 다운더라인 님이시죠? "
저 형. ID도 저걸로 해놨네 정말 대단하다.
"네 저랑 제 파트너 2 명입니다. "
"오늘은 남복과 혼복 번갈아가면서 할 예정이구요. 여자분 1분이 늦게 오신다고 하셔서 일단 남복으로 먼저 돌아가다가 여자분 오시면 계속 혼복으로 하겠습니다. 그럼 5분 정도 몸 푸시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코트 옆에 테니스 가방과 음료수 등 짐을 풀고 대기하며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잘 마련되어 있었다. 거기서 짐을 풀고 있을때 재현이 형이 조용히 말을 던져왔다.
"저 사람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아? "
"그러게요. 어디서 본 거 같기도 한데. 제가 얼굴을 잘 못알아봐서요. "
"저 사람 지난 대회에서 재민이랑 8강에서 만났던 사람이잖아. 재민이가 이겨서 4강 가고 거기서 떨어지고. "
아 맞다. 재민이가 그 때 중요한 포인트에서 대부분 인이라고 봤던 공을 아웃이라고 부르면서 저 팀의 멘탈이 나가기 시작했었던 게 머리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포인트가 노애드였을텐데 그 게임을 저 팀이 가져갔다면 4강의 주인공은 바뀌었겠지. 근데 그러면 저 사람 잘 친다는 거잖아. 나랑 재현이 형 괜찮은가
"형 그럼 다들 잘 치는 거 아니에요? 우리 여기서 민폐만 되는 거 아니에요? "
"그래서 우리가 온 거 아니냐. 언제까지 비슷한 사람들하고만 칠 거야. 요즘 스타일로 더 잘 치는 사람 공도 받아봐야지. "
재현이 형의 포인트는 그거였다. 클럽에서 잘 치는 고수들은 약간 옛날 테니스다. '서브 앤 발리' 라는 복식 전략만 고집하는데 테린이 대회를 나가보니 서브하고 발리하는게 아니라 요즘 사람들은 서브하고 강력한 스트록으로 유리한 찬스를 만들어가지 않았느냐. 사실 우리가 예선 탈락했던 마지막 게임도 클럽에서 형들이 알려준 그런 전략이 아니라 상대팀에서 안정된 스트록으로 무장하고 나오니 어설프게 발리하러 들어갔다가 게임이 우리에게 불리하게 흘러가면서 계속 끌려다니는 모양새였다.
"알았어요. 열심히 해봐요. 멘탈 강화하러 왔다고 생각할께요. "
"그래 그 때처럼 너가 포하고 내가 백할께"
처음에 이 포와 백에 선다는 말을 몰라서 클럽에 들어가서 고생했는데, 포에 선다는 건 테니스 코트의 듀스(Deuce) 사이드, 백에 선다라는 건 애드(Advantage) 사이드에 선다는 것이고, 클럽 형들에 의하면 백에 서는 사람이 통상적으로 두 사람에서 에이스 역할을 맡게된다.
재현이 형이 그렇다면 에이스인가 를 고찰해보면, 스트록은 내가 더 나은 편인데 재현이 형이 발리가 조금 더 좋고, 센스가 더 좋아서 중요한 순간에 포인트를 잘 따서 그냥 재현이 형이 백자리에 서는 걸로 합의했다. 아니 사실 코치님이 나는 포, 재현이 형이 백이라고 정해줬다.
재현이 형과 나는 네트 앞으로 걸어가 서로 인사를 한 뒤, 가위바위보 후 어디가 서브를 먼저할 지부터 정했다. 우리 팀에서 먼저 시작하는 서브. 재현이 형은 허리가 좋지 않다면서 나에게 서브를 먼저 시켰다. 모르는 사람과의 첫 게임. 그리고 먼저 시작하는 서브가 나. 왜 가위바위보를 이긴거지. 서브 잘 못해서 서브를 먼저 하면 늘 부담이었다.
"0 4 요"
어느덧 4게임이 지났다. 나로부터 시작한 첫게임, 그 다음 상대방의 첫번째 서브 게임, 재현이 형의 서브게임,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의 서브게임. 나는 긴장해서 첫 게임때 더블폴트를 3개나 해버리고, 재현이 형은 서브가 약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무지막지한 리턴 공격으로 4게임이 끝나는데 한 8분 걸렸나.
보통 남복으로 1세트 게임을 하면, 레벨이 잘 맞고, 랠리가 길어진 중상 수준 이상의 게임은 소요시간이 25~40 분 정도 걸리는데, 레벨이 안 맞거나, 3구 이상 랠리가 안 되면 소요시간이 20분 미만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지금 이 게임은 15분 언더 흔히 말하는 '육빵', 영어로는 베이글 스코어가 나오게 생겼다.
"준경아 이제 시작이야. 우리 오늘 이길려고 온 게 아니잖아. 그냥 우리 공 열심히 치자. 우리가 그렇게 못하지는 않아. "
"알겠어요 형. 저도 좀 버텨볼께요. 형도 앞에서 기회 생기면 과감하게 잘라 주세요. "
테니스 복식에서는 어느 팀이 빠르게 네트 앞 부분을 점령해서 상대방의 스트록을 발리로 잘라서 포인트로 가져가느냐가 승리 전략이다. 그런데 빠르게 2명이 네트로 들어가야 하는데 우리같은 테린이는 한 명이 계속 뒤에 있다보니 상대팀에서 여유롭게 2명이 다 네트를 점령해버리면 속수무책으로 게임을 잃고 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상대방의 스트록을 잘 버티고, 형은 발리로 상대방을 압박하면 내가 네트로 들어가 두 명 모두 발리로 압박해 게임을 가져가자라는 취지였다.
"수고하셨습니다. 물 좀 마시고 잠깐 쉬었다가 다시 게임 들어갈께요. "
"형 저 사람들은 땀도 안난 거 같은데요. 우리만 힘든 거 같고. "
"헉헉. 우리만 죽도록 뛰어다녔으니 우리만 힘들지. 저 사람들은 방향만 바꿔서 이리 보냈다 저리 보냈다 하니 뭐가 힘들겠어. "
"이렇게 뛰어다녔는데 6:1로 진 건 좀 자존심 상하는데요. "
"1게임 땄잖아. 아 씨. 그래도 3게임은 따야하는데. 아 왜 이렇게 안 되지. "
"워워 형. 짜증내면 우리 더 못쳐요. 알잖아요. 테니스는 멘탈 스포츠. 워워. "
"에이 씨. 알았다. 나 화장실만 갔다 올께. "
재현이 형에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너무 못치고 무력한 나에게 화가났다. 아 시작한 시기도 비슷하고 나도 레슨 받는데 왜 이리 못치는 거지. 이렇게 한숨 쉴때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블이 좀 심하던데요. 서브 연습 좀 해야할 거 같던데. "
희성 대리님. 왜 당신이 여기 계신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