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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과장 Oct 02. 2019

신부족주의와 민주주의의 위기#4

정체성의 정치

Source: Foreign Affairs


진보에서 보수로

정의 구현의 범위를 좁히면서, 정체성 정치는 많은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 정책들을 만들어내고, 문화적 개념을 변화시켰습니다. Black lives matter movement는 미국 전역의 경찰관들에게 소외집단을 대할 때의 의식 개선에 도움을 줬습니다. 미투 운동은 성범죄에 대한 인식을 넓혀줬고, 성범죄 관련 법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 냈습니다. 가장 큰 결과는 회사에서 남성과 여성이 일하는 방법의 변화일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정체성 정치는 좋은 면만 있어 보이네요. 부당함에 대한 자연스러운 대응처럼 보이니까요. 


하지만 30년간 발생한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되돌리려고 하는 노력과 집중력을 기울였던 정체성 정치는 점점 이런 주제들과 멀어지고 있습니다. 정책을 바꾸는 것보다 주장하는 것이 더 쉽고, 학계 밖에 있는 여성들, 소외집단 구성원의 소득과 기회를 증가시키는 것보다 대학 교과과정에 명망 있는 여성 작가와 소외집단의 작가를 포함시키는 것이 더 쉽습니다. 최근 정체성 정치의 강력한 지지층은 실리콘 밸리의 고위 임원, 할리우드 스타이며 이런 사람들의 소득은 최상위권입니다.

어찌 되었던 이런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은 좋지만 최상위권 소득층의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의 소득 불평등을 비교하는데 큰 역할을 하지는 않을 겁니다. 


최근 진보진영의 정체성 정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큰 문제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최근까지 진보 진영은 교외 지역에서 편부모 슬하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들의 급증한 마약문제에 대해서는 함구해왔습니다. 또한 자동화 등 점점 기계가 일자리를 대체하며 모든 미국인들의 일자리를 뺏어가는 문제에 대해 어떤 전략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진보의 정체성 정치는 발언의 권리와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합리적 폭로에 대해서도 위협을 가하고 있습니다. 자유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건 어떠한 것, 특히 정치적 영역에 관한 발언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정체성의 정치는 이런 발언의 자유의 필요성을 산산조각 냈습니다. 소외그룹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 그동안 심사숙고해서 만들어진 혜택과 이성적 검토보다 감정적인 의견을 더 우선순위에 두었습니다. 누군가의 가치를 공격하는 주장에 대해서 반박할 가치를 못 느낀다거나 그 주장을 한 사람을 폄하하는 것이 기본 룰이라고 여겨지고 있습니다.(주: Political Correctness에 관련한 내용입니다. 어떤 발언이 hate speech에 해당되는지 아니면 개인의 의견인지에 대해서 한국과 미국 다 갑론을박이 있습니다)


정체성 정치에 의존하는 것은 정치적 전략으로도 약점이 있습니다. 현재 미국 정치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데에는 이전에 없었던 양극화 현상이 관련이 있습니다. 이런 비난의 대부분은 보수 진영에게 있습니다. 진보 진영이 극좌파로 가는 속도보다 보수 진영이 극우화로 진행되는 것이 훨씬 빨랐기 때문이죠. 여하튼 두 진영 모두 중도에서 멀어졌습니다. 좌파 운동가들이 집중했던 정체성 이슈는 대부분의 선거인단의 관심 가는 사항이 아니었고, 대부분의 유권자들을 소원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진보 진영이 만든 가장 큰 실수는 다름 아닌 보수 진영이 정체성 정치를 하게끔 만든 것입니다. PC(Political Correctness)를 포용한 것이 가장 큰 부분입니다. 모든 사회는 법치사회의 기초와 어긋나는 관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불거진 새로운 소외 집단과 허용 가능한 발언의 수준을 대응시키기는 쉽지 않습니다. 집단의 존엄성에 맞춰진 사회에서는 새롭게 등장한 이 경계선이 점점 밀고 들어오면서 예전의 화법은 공격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즘 어떤 상황에서는 그가 그녀(he or she)라고 지칭하는 것은 트랜스젠더인 사람들을 고려하지 않은 신호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주장이 민주주의의 근본을 위협하지는 못합니다만 이런 주장은 특정 집단의 자존감을 떨어뜨린다거나 그 집단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걸 알려줍니다.


실제로는 소수의 작가, 예술가, 학생, 지성인만이 PC를 열렬히 옹호합니다. 하지만 보수 미디어는 극단적 PC를 채택하면서 소수의 의견을 진보 진영 전체의 의견으로 몰아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이상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코어 집단이 끊임없는 지지를 보낼 수 있었던 원인입니다.


선거기간 동안 트럼프는 기자의 신체적 결함을 조롱했고, 멕시코 사람들은 범죄자로 특정했습니다. 이런 발언들은 PC에 대한 범죄가 아니라 기본 예의에 대한 범죄적 성격이 더 강했습니다. 또한 트럼프의 지지자들 역시 트럼프의 발언에 대해서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많은 미국인들이 트럼프의 발언들이 과도한 정치적 멘트였으며, 트럼프가 그 발언으로 인해 공격받는 걸 겁을 먹지 않는다는 사실을 좋아했습니다. 


PC가 주도적인 시대에서 트럼프는 악의적이고 편견이 아주 심하지만 최소한 그는 그가 생각한 걸 그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또한 트럼프가 인기를 얻었다고 해서 보수 진영이 정체성 정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런 것이야말로 정체성 정치를 보수 진영이 포용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냐면 많은 근로자 계층은 엘리트 층에 의해 무시받았는데 자기들을 인정해주는 정치 집단이 나타난 것이니까요.


미국, 유럽의 교외 지역에 살고 있는 포퓰리즘 정치의 핵심인 근로자 계층은 도시에 살고 있는 엘리트들이 자신들을 위협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백인 근로자 계층은 여전히 미국에서 주도적인 집단이지만 자신들은 소외되었고 희생양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감정들이 바로 가장 극단적인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등장하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트럼프는 이 과정에 직접적으로 기여했습니다. 트럼프가 부동산 거물에서 정치인으로 변모할 수 있었던 건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 대한 끊임없는 음모론을 제기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 후보일 때 그는 KKK 리더가 지지한 것에 대해 의견을 물었을 때 얼버무렸고, 트럼프 대학에 대한 소송은 멕시코 부모를 둔 판사가 담당을 하기 때문에 불공평하다고 말했습니다.


트럼프로 인해 백색 국가주의는 주변에서 주류로 올라서게 되었습니다. 백색 국가주의의 옹호자는 흑인의 인권, 동성연애자들의 인권, 여성의 인권들에 대해 얘기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백인들의 권리를 옹호하려면 여전히 인종 차별주의자라는 오명을 뗄 수 없다고 불평합니다.


진보 진영에서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이런 발언은 역사적으로 자신들이 특혜를 받은 걸 고려하면 소수 집단의 권리 옹호와 비교할 수 없는 차원이라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소수 집단이 받는 혜택이라는 것은 PC가 발언의 자유를 제한하는 딱 그 정도입니다. 흑인들은 여전히 경찰의 폭력에 놓여 있고, 여성들은 공격당하고, 위협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수진영이 이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어떤 언어를 사용하고 framing을 어떻게 하는지에 주목해야 합니다.


백인들은 미디어와 정치적 공세로 인해 희생당하고 있으나 그마저도 사회에게 보이지 않고 이 모든 것은 사회와 정치적 구조 때문이니 다 때려 부셔야 한다는 프레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념적 연장선에서 보자면 정체성 정치는 현재의 사회현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렌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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