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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상익 Feb 25. 2019

(서평)『이지함 평전』신병주 지음

은둔과 변혁의 변증법적 실천가

이지함 평전-은둔과 변혁의 변증법적 실천가/신병주 지음/ 이원종 서평 / 글항아리



'이지함' 하면 자연스레 토정비결을 떠올리게 된다. 알다시피 토정은 이지함의 호인데, 물가에 '흙으로 지은 정자'라는 뜻이다. 그는 실제로 마포강변에 있던 그의 집에 흙을 쌓고, 그 위를 평평히 하여 정자로 삼았다고 한다.


- 지금도 마포대교 입구에서 신석초등학교를 거쳐 상수동에 이르는 길을 '토정로'라 이름 붙인 것에서 이지함의 행적을 찾아볼 수 있다. (69쪽)




토정비결로 너무도 유명한 이지함이지만, 실제로는 아직까지 이지함의 저작이라는 설과 그의 이름을 후대에 가탁한 것이라는 설이 분분하다고 한다. 여러가지 근거를 들어 저자는 이지함의 저작이 아니라는 설에 힘을 보태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토정비결에 담긴 뜻은 주역을 통한 이지함의 사상과 통하는 측면이 많다.



기행으로도 유명한 그의 행적을 소개해주는 글들 역시 많이 실려있다.


- 토정 이지함은 이상한 행동을 잘하였다. 구리로 만든 노구솥을 머리에 쓰고, 그 위에 패랭이를 얹어서 밤낮으로 다녔다. 허기가 있으면 노구솥을 벗어 시냇가에 걸어두고 밥을 지어 먹은 후 씻고 말려 다시 머리에 썼다. 잠을 자고 싶으면 길가에서 지팡이를 짚고 서서 잤다. 오고가는 소나 말이 부딪쳐서 동서로 옮겨다니다가 5,6일 후에 비로소 깼다. ([동패락송], 77쪽)





그의 또다른 호가 물의 신선임을 뜻하는 '수선'이었다는 것도 그의 기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듯하다. 때로는 전설적인 일화가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처럼 토정비결과 기인으로서만이 아니라, 이지함은 실질적인 삶의 문제 해결에도 노력을 기울인 인물이었다. 저자가 재조명하고 주목하고자 한 이지함의 면모는 무엇이었을까.


첫째는 민생문제 해결을 최우선으로 했던 그의 사회경제사상으로 본다. 1,500년대 조선 중기에는 유난히 사화(조선 중기에 신진사류들이 훈신·척신들로부터 받은 정치적인 탄압)가 많았던 탓에, 일부러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과 문인 양성에 힘썼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런 사람들을 '처사'라고 했다. 사화에 의한 친구 안명세의 죽음에 영향을 받았던 이지함 역시, 일생의 대부분을 처사로서 살면서 전국각지를 유랑했다. 


이런 유랑생활은 그에게 생활고에 시달리는 많은 백성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며, 또한 이를 외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해결방안을 모색했던 점을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지함은 그가 돌아다니던 곳의 주민들에게 장사하는 방법과 생산기술을 가르쳐 무엇보다 자급자족의 능력을 기를 것을 강조했고, 가난한 주민들에게 자신의 재물을 분배해 주었으며, 무인도에 들어가서는 박을 심어 수확해 곡물과 교환하여 빈민을 구제하기도 했다.




둘째는 격의없고 개방적인 그의 처세일 것이다. 목은 이색의 7대손이자, 그의 조카 이산해는 선조 밑에서 영의정과 이조판서를 지낼 정도로, 이지함은 명문가인 한산 이씨 출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능력이 있으면 문인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민생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피지배층의 이익을 대변하며, 본업인 농업 이외에도 당시 말업으로 여겼던 상업, 수공업, 수산업에 직접 종사했다는 점도 놀랍다.


셋째로 그의 학문 역시 개방성과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의 적극적 '말업관'과 토정비결을 저술했다고 알려진 것 역시 그의 다양한 사상 수용과 깊은 관련이 있다. 1573년과 1578년에 각각 포천현감과 아산현감에 등용되어 자신의 이상을 현실정치에 직접 실현할 기회를 맞았지만, 백성들의 삶 속에서 체험한 구체적인 정책들이 당대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이 안타깝다. 그러나 백성들의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을 도입하자는 그의 사상은 후일 실학자나 북학파의 사상의 원류가 되기도 했다. 해외통상의 필요까지 강조한 국부증진책 역시 중요한 경제정책으로 훗날 계승되었다.


사상논쟁과 당파싸움에만 열중했던 조정의 관리들과 달리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실천적으로 나름의 정책을 시도했던 이지함은 당시의 서민들에게 큰 위안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사실여부와 관계없이 토정비결의 저자로 이지함을 떠올리는 것은 그의 친민중적인 성향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 결국 점술이나 관상비기에 능했던 이지함의 행적이 민중들에게 널리 전파됐고, 19세기 이후 비결류의 책을 만들면서 [토정비결]이란 이름을 가탁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지함을 타이틀로 한 책을 만들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을 것을 기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토정비결]은 당시까지 민중들에게 슈퍼스타로 자리매김하고 있던 이지함의 이름을 빌려 오늘날까지 베스트셀러로 만들어낸 데 성공한 책으로 불 수 있다. (71쪽)


고등학교 시절 국사 선생님은 유독 조선사에 대해 강의할 때면 흥분을 하고는 했다. 특히 소론, 노론, 남인 북인, 서인 등으로 나뉘어 정쟁을 일삼으며 정작 닥쳐온 국가의 위기는 외면했던 조선 중기의 문신들이 표적이었을 것이다. 조선시대는 우리의 역사에서 없어져야 할 시기라고 하기까지 했다. 그 이후 역사서를 읽어볼 기회가 없었기에 그런 역사관에서 한동안 벗어날 수 없었다.


이 책 중간중간의 조선 사회상과 생활상을 담은 여담 중에 조선왕조실록의 편찬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흔히들 역사를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여 그 진위를 끊임없이 의심하기도 하지만, 그런 우려를 예상했듯 조선왕조실록만은 왕의 열람을 허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의 독립성을 보장받지 못해 사실이 왜곡될 우려를 염려한 때문이다. 사관의 조직도와 실록 편찬과정을 살펴보면 그처럼 치밀할 수가 없다. 공정성과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만전을 기했던 그들의 노력을 보면서, 과연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 이 시기를 논쟁과 당파싸움의 시기로만 볼 것인가하는 의문이 든다.




저자가 밝혔듯 이 평전은 사회경제정책을 제시한 현실개혁가로서 16세기를 치열하게 살다 간 현실 속의 이지함을 소개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황과 이이로 대변되는 16세기를 이론논쟁의 시대로만 이해하는 것을 벗어나, 조식이나 이지함 같이 다양한 사상을 받아들이고 민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던 지식인들의 시대로 보고자 하는 것이다.


너나할 것 없이 '친서민'을 외치고 있는 '그들'에게 500년 전의 이지함은, 실제로 백성들의 삶 속에 들어가 체험을 해보라고, 그곳에서부터 해결책을 찾아보라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


- 우리는 서양의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가 쓴 [국부론]은 잘 알고 있으면서, 막상 우리 선조인 이지함이 애덤 스미스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그러한 사상을 제시했던 사실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애덤 스미스보다 앞선 시기에 적극적인 국부론을 주장하고 실천한 학자 이지함, 그것 하나만으로도 이지함은 재평가되어야 할 인물이다. (저자 서언)



글쓴이 : 이원종

저자이자 독서경영 전문가로 활동 중인 이원종님은 중앙대학교 수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이지리더 독서경영 연구소 대표와 오간지프로덕션 북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입니다. 명지대, 한성대, 오비맥주,인천/안산 CEO아카데미 등 주요 기업체 특강 등을 통해 ‘책만이 살 길이다’, ‘독서경영을 바탕으로 한 성공의 길’ 등의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주)세계화전연구소 성공칼럼니스트, YES24 스타 블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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