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통과의례
갑작스런 연락이었다.
물론 갑작스럽지 않은 부고도 있기야 하겠지만, 부고에 동봉된 죽은은 대부분 갑작스럽다.
오랜동안 만나지 않은, 대략 20년 정도 만나지 않은 대학 친구의 부친상이 단체 카톡으로 알려져 왔다.
20년을 만나지 못했지만 얼마전부터 이 단체 카톡방에서는 이런 저런 얘기들을 재잘거렸던 것을 보면 만나고 있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여름 휴가가 시작되었고, 고속도로는 차들로 벌써부터 혼잡하기 시작했다는 뉴스가 들여온다.
카톡방에는 고속도로가 혼잡할 수 있으니, 청량리에서 원주까지 입석은 자리가 남아 있다는 새로운 정보도 라디오 뉴스보다도 주요한 뉴스처럼 들려온다.
원주까지 1시간이라지만 청량리까지 지하철로 가야하는 번거로움에 영동고속도로가 덜 혼잡할 저녁시간에 문상을 하기로 하였다.
오가는 길 심심하다고 아내가 함께 나선다.
장마가 멈춘 사이 북한산은 눈앞처럼 가까이 다가온다. 구름은 미래소년 코난의 바다위 하늘처럼 비현실적이리만치 아름답고 운전을 하면서도 자꾸 곁눈질을 하게 한다.
20년 가까이 만나지 못한 친구는 정부 산하 기관에서 꽤 오랜동안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펩북에 딸아이와 놀이동산 간 사진을 가끔 보기도 했지만, 그간의 소소한 얘기를 주고 받은 적은 없었던 듯 하다.
이 반사적으로 움직여지는 나의 채비는 무엇일까? 애소사를 잘 챙기는 그리하여 미래에 예정된 내 애소사를 위한 상조의 습관성 반응인가? 하는 생각이 꿈틀거린다.
죽음은 인생의 대미가 되는 마지막 통과의례임에는 틀림없지만, 정작 그 통과의례를 죽음의 당사자는 경험하지 못한다. 당사자에게 죽음은 결코 인식되거나 인지될 수 없는 것이기에 말이다.
어쩌면 죽음은 그리고 그 죽음이 장사되는 장례식은 산 자들만의 통과의례인지 모른다.
예상외로 담담한 친구에게 부친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해서 전해 듣는다. 여든이 넘긴 연세이기는 하나 갑작스럽지 않은 죽음이란 없다. 정말로 갑자기 가운데가 툭하고 부러져 버리는 그런 것 말이다.
한 살 빠른 일곱살에 초등학교 입학을 했던 친구는 재수를 해서 대학에 들어온 나보다 나이로는 두살이나 어렸다.
부친의 부음을 전해듣고 달려온 첫날은 정신차릴 수 없는 격한 감정으로 힘든 날을 보냈던 친구는 둘째날 훨씬 더 어른스러운 담담함이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것이긴 하나 여든 넘기신 연세에 큰 고통없으셨다는 것에 감사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통과의례를 지나고 있구나"
나의 습관성 채비 또한 통과의례였을지 모른다.
부친상을 치르는 친구의 곁에 잠시 머물러 주는 것 말이다.
사후의 세계의 존재 여부는 우리의 기대나 단정과 다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하여 내 살아있음의 의미가 더 가벼워질 이유는 없다.
돌아오는 길.
이미 8시가 넘어 동쪽은 새까만 하늘이지만 서울쪽 하늘은 여전히 빛이 남아있다.
저 너머에는 여전히 빛이 있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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