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자의 행복론.

행복 앞에서는 남창이 되어야 한다던 그.

by sangillness

서울역이었다.


역사에 들어가기 전, 담배나 한 대 피울 요량으로 흡연 부스에 들어갔다.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주변에서 뿜어내는 담배 연기에 눈을 질끈 감았다. 담배를 피우는 입장에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이 참 어이없게 들리겠지만, 남이 내뿜는 담배 연기는 언제나 불쾌하다.


연기가 어느 정도 잦아들고 서서히 눈을 떴는데, 노숙인으로 보이는 아저씨 한 명이 내 눈앞으로 손을 내민다.

"담배 한 개비만 어떻게 안 될까요?"

못 들은 척하며 바닥으로 고개를 내리깔다가 그의 눈빛을 보았다. 우수에 차있었다. 눈동자에 우주라도 갈아 넣은 건지, 아저씨의 눈은 이상하리만치 반짝였다. 하는 수 없이 담배를 서너 개비 꺼내어 그의 손에 건넸다.


담배를 다 피우고 나서는 주변에 보이는 계단에 앉아 책을 펼쳤다. 기차가 출발하기까지는 아직 한 시간도 더 남았다.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문장을 한 줄 한 줄 천천히 읽었다.


서너 줄쯤 읽었을까, 길 건너 텐트에서 기독교 집회 소리가 들려왔다. 한숨을 푹 내쉬고 책장을 덮었다. 책을 무릎 위에 얹어 놓고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 개미 콧구멍만한 나라라지만, 집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멀고 험하다.


가만히 앉아 생각을 정리하고 있으니, 누가 옆에서 말을 걸었다. 아까 그 아저씨였다.

.

"나도 그 책 좋아해."


"네?"


"아니 나도 그 책 좋아한다고, 향수. 쥐스킨트 맞지?"


"아, 네. 저도 이 책 좋아해요. 비극적이잖아요."


"꼭 그렇지는 않은데…."

.


놀란 나는 아저씨와의 대화를 계속 이어갔다.

말이 잘 통하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차가운 돌계단에 주저앉아 솔제니친과 동양 철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선입견으로 똘똘 뭉쳐져 있는 못난이라 그런지, 아저씨와의 대화가 원활하게 이뤄질수록 마음속에는 불편한 질문 하나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사지 멀쩡하고 배운 것도 많은 양반이 왜 여기서 이러고 있을까?'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물어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아저씨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겠지.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내가 바라나시에서 찾아 헤매던 사두와 아저씨가 무슨 차이가 있나 싶었다.

노숙을 하고, 현실 세계와는 조금 먼 이야기를 하는 것은 둘이 똑 닮아 있었다.




내가 아저씨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딴생각을 하는 사이, 이야기의 주제는 행복으로 넘어갔다.


몇 년간 온 지구를 쏘다니며 찾아 헤맸지만, 행복을 만지기는커녕 그 뒷모습도 만난 적이 없다.

내가 또 한 번 딴생각하는 사이, 아저씨는 소리 내어 말했다.

"나는 행복 앞에서는 남창이야. 모든 사람은 싼값에 자신을 팔 줄 알아야 해. 적어도 행복 앞에서는"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아저씨가 다시 말했다.

"뭘 놀라고 그래. 행복 앞에서는 쉬운 사람이어야 한다고."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되물었다.

"행복의 역치를 낮추라는 이야기죠?"


아저씨는 다시 말했다.

"그렇지. 바로 그거지."




얼마 전 책에서 행복의 역치에 관한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그 글을 읽은 후에는 내 행복의 역치도 조금 더 낮아졌으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아저씨의 말이 그런 내용인 줄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작은 것 하나에도 행복을 느끼는 것.

흔히 말하는 소확행이 나로 하여금 너무나도 크고 거대한 행복으로 다가오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행복의 역치를 낮추는 것이 아닌가 싶다.


거대하지만 또 미시적인, 그런 형체 없는 행복을 찾기 위해 빙빙 헤매곤 했는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함과 동시에 버스가 내 앞에 섰던 일.

매일 마시던 씁쓸한 커피를 오늘도 한 잔 마신 일.

기차를 기다리다가 우연히 아저씨를 만난 일.

어쩌면 오늘 지나친 모든 것들이 행복일 수 있었으니까.

저 멀리 있는 커다란 행복만 바라보느라 주변에 있는 작은 행복들을 다 지나쳐버렸다.


아저씨의 표현이 다소 과격하고 상스럽긴 했지만 분명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오늘 할 일.

내 주변에서 행복을 찾기.

작은 일에도 행복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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