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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illness Jul 22. 2020

투명한 여자 김아린

아린이를 처음 만났던 날은 넘치게 뜨거웠다. 7월 초, 하노이 날씨가 워낙 뜨겁기도 했지마는, 그 날의 분위기에는 한여름 날씨와도 견줄 수 없는 강렬함이 있었다.


서호 근처에 있는 작은 반쎄오 가게였다. 가게 주변으로 펼쳐진 골목길은 귀가 따가울 정도로 시끄러웠지만, 나름의 규칙에 따라 가지런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렇다 말하기도 어려운 전형적인 베트남의 풍경이었다. 가게 안쪽에서는 베트남 아저씨 서너 명이 시끄럽게 이야기를 나눴고, 그 뒤에는 왜인지 시선을 잡아끄는 여행자 한 명이 앉아있었다. 족히 두어 달은 나돈듯한 추레한 모습의 그녀는 입을 삐쭉 내밀며 노란색 반쎄오를 째려봤다. 뾰로통한 그녀의 표정 사이로, 문득 지난번 이 가게에서 반쎄오를 먹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문 앞에 대문짝만하게 걸어둔 'Bánh Xèo'라는 간판이 무색하게, 이 가게의 반쎄오는 파격적일 만큼 맛이 없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큭'하고 짧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한 30분쯤 지났을까, 적당히 밋밋했던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어깨에 올려진 작은 손끝에서 코가 뻥 뚫릴 만큼 진한 대마초 냄새가 진동했다.

"혹시 이거…, 남기신 거면 제가 먹어도 될까요?"

"네? 아, 네네. 여기 반쎄오 진짜 맛없죠?"

"네. 처음이네요. 이런 음식은"

짧은 대화가 끝나자마자, 그녀는 멀뚱히 내 맞은편에 앉았다.


나는 가만히 서서 반쯤 채워져 있던 접시가 순식간에 비워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해가 되면서도 이상한 그녀의 정체가 미치도록 궁금해서였다. 눈치를 주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그녀는 나의 시선을 적잖이 의식했는지 멋쩍게 입을 열었다.

"제가 너무 추했죠? 남기면 아깝잖아요."

"맞아요. 남기면 아까워요. 근데 이것도 맛이 그다지…."

그녀는 새하얀 윗니를 내비치며 내 앞으로 왼쪽 손을 들이밀었다.

"저는 김아린이에요. 이거는 제가 계산할 테니까 나가서 커피 사주세요."

"그래요. 좋아요."

나는 오늘 처음 만난 조금 '이상한'사람을 따라 골목을 걸었다. 낯선 사람, 특히 이상한 사람과의 동행은 여행을 다니면서 꾸준히 피했던 요소지만, 그때는 그냥 그래도 될 것 같았다. 환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에 '나는 착한 사람이에요'라는 글씨가 적혀 있기도 했고, 매몰차게 거절하기에는 아쉬운 그런 특별한 상황이기도 했다.


그녀는 걸으면서도 잠시를 쉬는 법이 없었다. 길가에 고양이가 있으면 쪼그려 앉아 한참이나 "나비야"를 외쳤고 화단의 꽃을 보면서도 연신 효과음을 내었다. 카페에 도착해서는 애써 주문한 커피를 다시 '웩'하고 뱉어내더니 원래 자기는 커피를 못 마신다며 머쓱한 웃음을 짓기도 했다. 심지어 내 나이를 묻지도 않았던 아린은 줄곧 나를 오빠라고 불렀다. 어렸을 때부터 오빠가 있었으면 했는데, 그때 떠올린 가상의 오빠 이미지와 내가 어느 정도 닮았기 때문이란다. 시간이 꽤 흐르고 나서 우리가 동갑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는 한동안 어색한 기류가 흘렀지만, 독특했던 우리의 관계는 한낱 호칭에 발이 묶일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기에 그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린의 행동에는 아무런 때가 묻어있지 않았다. 그녀는 비좁은 틀 속에 갇혀있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으며, 또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속에서 행복을 찾으려 애썼다. 이렇게 천진하고 깨끗한 사람이 또 있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이의 기분을 작작하게 만들어 줄 수 있었던 그녀는 가을철 하늘과도 같은 파란색 사람이었다.


하노이에 있는 동안은 쭉 아린과 함께했다. 매일 같이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호수를 바라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면 진한 회색으로 물든 나까지 파란색 사람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람에게 정을 주는 것이 무서워서 잠깐 거리를 뒀던 적도 있었는데, 그 끌림이 너무나 강해서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었다.




내가 아린과 헤어지게 된 것은 처음 만난 날로부터 열흘쯤이 지났을 때였다. 이미 계획한 다른 일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작별인사를 해야 했다. 하노이를 떠나기 전날 밤, 빵조각을 물어뜯는 아린의 앞에 앉아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내일 공항 가야 해. 출국 날이거든."

그녀의 눈두덩이는 곧 붉어졌고, 입은 삐쭉 튀어나왔다. 그 중요한 사실을 왜 이제야 말하는 것이냐며, 묵언의 항의를 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잠깐 눈물을 글썽거리다가 목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말했다.

"그러면 나도 내일 공항까지 같이 갈래."

나는 웃으며 말했다.

"괜찮겠어? 나야 당연히 좋지."


이튿날 아침, 우리는 호안끼엠 호수 앞에서 만나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택시 안에서 아린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별의 무게는 딱 그 정도가 아닐까 한다. 모두의 입을 닫게 하고, 입으로 빠져나오던 열기가 눈가로 모이는. '후드득'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서 밖을 내다보니, 때마침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어지간히 쓸쓸하고 또 씁쓸한 아침녘이었다.


소음 금기시되었던 차 안에서 처음으로 침묵을 깬 것은 아린이었다. 아린은 나에게 전화번호를 물었다. 평소 같았으면 핸드폰이 없다는 싸늘한 농담으로 거절했겠지만, 그때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주 무거운 후회를, 그것도 꽤 오랫동안 할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낡은 노트 한 장을 찢어서 그 위에 내 한국 번호를 꾹꾹 눌러 적었다. 어떻게든 마음을 전하고 싶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어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공항에 도착할 때쯤, 휴대전화로 비행기가 4시간 연착되었다는 알림이 도착했다. 하지만 아린에게 굳이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당장 택시를 돌려서 서호에 있는 작은 반쎄오 가게로 가자고, 맛없는 밥을 다 먹고 나서 그 옆에 있는 찻집에서 나는 커피를 마시고 너는 녹차를 마시자고, 그다음에는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자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움찔거리는 입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이별이 길어지면 상처도 더 깊어진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택시가 다 서기도 전에 택시에서 내렸다. 무거운 택시의 공기, 그야말로 '이별택시'의 분위기가 싫어서였다. 트렁크에서 배낭을 꺼내고, 주머니에 남은 잔돈을 모두 그녀에게 건넸다. 이제는 정말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다. 아린은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다시 내 앞으로 왼손을 들이밀었다. 여전히 대마초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 역시 왼손으로 살포시 그 손을 잡고 몇 초간 흔들었다. 이별의 열기가 다시 눈가로 모였는지, 그녀의 눈두덩이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 버거워서 서둘러 공항 안으로 도망쳤다.


자동문이 닫혔고, 흐릿한 창문 밖으로 주저앉은 아린의 모습이 보였다. 이번에는 내 눈가가 뜨거워졌다. 열기를 식혀보려 입을 열고 몇 번 한숨을 내뱉어 봤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미 익어버린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허공을 떠돌았다. 배낭을 힘없이 질질 끌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하필이면 유리로 된 엘리베이터여서 이따금 창밖으로 시선이 향했다. 혹시나 아린과 마주칠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엘리베이터가 출발층에 도착했을 때도 나는 얼마간 눈을 감은 채로 있었다. 티 없이 투명한 그녀의 모습이 감은 눈꺼풀 사이를 바쁘게 오가다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내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별의 한기가 가시고, 쓸쓸함만 남은 것이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녀를 떠올리는 것보다야 혼자서 쓸쓸한 게 몇 배 더 낫다.

그리고 그때부터였다. 이별의 순간마다 눈을 감는 버릇이 생긴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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