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추억하는 밤
모스크바의 겨울
늘 눈을 치우는 소리에 잠이 깨곤 했던 기억이 있다..
새벽이면 어김없이 동네에서 눈을 치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눈을 뜨지 못한 새벽 어둠 속,. 창가 골목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아 오늘도 눈이 많이 왔나보나’ 생각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언제나 하얀 눈이 기다리고 있던 겨울이 생각난다..
눈이 내리는 밤이면 나는 자주 기숙사 방 창가 곁에 놓인 낡은 의자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곤 했다. 그 곳에서 오렌지빛 가로등 아래 곱게 빛나던 눈의 모습이 신기했다. 언어가 다르듯, 사람들 모습이 다르듯, 그 곳에서 바라보던 눈송이의 모습도 달랐다.
처음에는 그렇게 바라만 보던 눈을, 산책을 자주 하며 맞게 되었다. 러시아 사람들은 산책을 하는 것이 생활화 되어 있다. 유모차에 누운 어린시절부터 그들은 산책을 한다. 아무리 추워도, 눈이 많이 내려도 어김없이. 그렇게 나도 러시아에 있으면서 산책을 하게 되었다.
그 눈 덮인 자작나무숲을 거닐면서 어느 날 알게 되었다.
‘그래서구나! 톨스토이와 푸쉬킨, 차이코프스키와 라흐마니노프의 나라가 그래서 이곳이구나!’ 그들이 산책했을 그 땅, 그 겨울을 느꼈다.
19세기 러시아의 시인 추제프는 “러시아는 머리로 이해할 수 없다. 러시아는 자로 잴 수 없다. 러시아는 그저 느낄 뿐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 겨울날의 러시아를 느끼려면 표도르 샬리아핀(1873∼1938)의 음성을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흥겨우면서도 슬프고, 힘차면서도 쓸쓸한 러시아 민요의 영혼을 그의 음성으로 듣는다면 듣는 순간, 가도 가도 해가 지지 않는 대지를 호흡하는 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샬리야핀은 ‘전설의 인물’로 통한다. 20세기 아니, 음악 역사상 가장 낮고 묵직한 저음을 구사한 베이스였다는 그의 목소리는 ‘영혼을 울리는’ 소리로 통했다. 합창음악을 들어봐도 베이스가 가장 강하고 낮게 깔리는 러시아 베이스 전통의 화신이 바로 샬리아핀이었던 것이다. 자신만의 독특한 영역을 가졌던 그는 벨 칸토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발성으로 그의 저음을 더욱 강화시켰다.
아직 20대이던 1901년. 처음으로 러시아 밖으로 나가 밀라노 스칼라 극장에서 공연한 그는 ‘신비의 베이스’로서 이미지를 굳혔다. 무소르그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는 이탈리아의 청중들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다.
이태리 밝은 태양 아래 맑은 대기를 가르며 뻗어나가는 화려한 벨 칸토 창법의 고음에 익숙했던 사람들이 차가운 대기의 분위기를 싣고 묵직하게 아래로 깔리는 저음의 비극성이 영혼을 송두리째 흔들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음성은 매우 따뜻하다. 그래서 나는 추운 겨울에 자주 그의 음악을 듣는다. 가슴 저편에서부터 뜨거운 기운이 올라오는 것만 같다. 그의 끝이 없을 것 같은 저음의 목소리.
그가 세상을 떠난 지 80년이 더 지났건만 사람들은 ‘샬리아핀의 전설’을 얘기한다. ‘러시아의 전설’, ‘20세기 최고의 신비의 베이스’ 러시아 민요와 가곡에 예술의 숨결을 불어넣은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받는 전설의 가수. 그의 ‘볼가강의 뱃노래’을 듣고 싶은 밤.
그를 추억하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