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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인 Mar 25. 2022

급경사 앞에서

중급 슬로프의 기억

이번 겨울에는 새벽스키에 제대로 맛들렸다. 새벽스키를 처음 탄 뒤로 거의 2주에 한 번씩 스키장을 갔다. 원래는 5년 전에 스키를 탄 것이 마지막 스키장의 경험이었다. 5년만에 신은 스키는 중급 슬로프를 타도 될 만큼 감각이 살아있었다. 퇴근 후 스키를 타다가 새벽에 서울로 돌아와 출근하는 극한 일정이지만 잠시 서울을 떠났다 돌아오는 일탈의 기분도 좋았다. 처음에는 중급 슬로프를 편히 내려올 실력이 못 되어서 한껏 긴장하고 아주 느린 속도로 중급을 내려왔다. 두 번째로 스키장을 갔을 때는 중급슬로프가 그리 무섭지 않았다. 속도를 붙여도 무섭다기보다는 재미있었고, 앞에 넘어진 사람이 있더라도 사이사이를 통과해서 내려가는 것에 무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막 중급을 즐기기 시작한 차에 연달아 두 번의 추돌사고가 있었다. 두 번 모두 교통사고라면 과실 10:0에 해당할 후방추돌이었다. 뒤에서 오는 사람이 완전히 나를 들이받았다. 굴러서 스키가 날아갈 정도였지만 천만다행으로 넘어지는 순간에 뼈에 충격이 가거나 꺾인 부분은 없었다. 교통사고처럼 만약을 대비해 상대방에게 받아둔 연락처도 다음날에 딱히 다친 곳 없으니 좋은 하루 보내시라는 안부연락으로만 사용되었다.


두 번째 충돌은 내가 그날의 마지막으로 슬로프를 내려오던 중 발생했다. 그러니까 스키장의 마지막 기억을 넘어져 구른 일로 간직하고 세 번째 스키를 타러 갔다. 충돌한 날은 낮이었고, 새벽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 괜찮을 거라 생각하며 슬로프에 올라갔지만 내 몸은 생각보다 그날의 공포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스키와 보드가 상당히 위험한 스포츠인 것은 원래도 잘 알고 있었다. 스키를 타다보면 꼭 한 번씩은 들것에 실려 내려가는 사람들이 보이고 아무리 스키를 잘 타는 사람이라도 한순간 운이 나쁘면 크게 다칠 수 있다. 그게 내 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실감한 것이다. 나처럼 엉덩방아를 찧은 정도는 가장 운이 좋은 것이고, 만약 넘어질 때 손목이나 팔을 짚었다면 바로 염좌나 인대손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내 장비나 상대방 장비에 살이 베일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나를 들이받은 사람과 뒤엉켜 구르면 대형사고다. 그래서 이번에는 슬로프를 내려가며 도무지 즐길 수가 없었다. 5년만에 중급을 내려오던 날보다도 더 긴장한 채, 뒤에서 눈을 긁으며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기만 해도 일단 멈춰섰다. 그러다보니 함께 올라간 사람들보다 내려오는 데에 배로 시간이 걸렸다. 비발디파크 중급코스는 중간에 경사가 급해지는 구간이 있다. 급경사 때문인지 눈이 쌓이지 못하고 빙판처럼 미끄러워서 중심을 확실히 잡고 내려가지 않으면 미끄러지기 십상이다. 내가 슬로프를 다니며 얻은 스몰 데이터에 따르면  유독 보드가 그 구간에서 많이 넘어졌다. 내가 충돌한 위치도 바로 이 구간이다. 그래서인지 많은 보더들이 급경사 앞에서는 앉아서 숨을 돌리고 있다그렇잖아도 긴장하고 내려가야 하는 구간에 충돌의 공포까지 더해지니 내려가는 길이 더없이 막막하게 느껴졌다. 심호흡을 몇번 하고, 가장자리 길로 잔뜩 긴장하며 내려갔다. 조금이라도 폼이 미숙해보이는 사람이 뒤에 있으면 멈추고 그 사람을 먼저 보냈다. 혹시 내게 부딪힐까봐. 그럼 그렇게 눈여겨본 사람들은 대부분 한번씩 넘어졌다. 역시 멈추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충돌하지 않는 것에 온 신경을 기울이며 내려오다가 문득, 급경사 앞에서 멈추지 않고 내려가는 사람들은 넉넉한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있는 점을 발견했다. 계속 멈추다보면 당연히 한참 뒤에 있던 사람도 거리가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나는 내게 돌진해오는 듯한 사람들이 무서워 더 자주 멈췄다. 새벽의 중급은 비교적 사람이 한산해서, 앞쪽 시야에는 넉넉한 공간이 확보되어 있었다. 그럼 나만 빨리 내려가면, 뒷사람이 내게 부딪힐 일이 없지 않을까?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급경사 앞에서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내려갔다. 생각한 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러 번 슬로프를 내려오며 내 몸은 이미 빠른 속도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내려갈 수 있었다. S자 턴을 하며 뒤쪽을 슬쩍 보아도 내 뒤로 넉넉한 공간이 있었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알고 나니 허탈했다. 이용시간 막바지에야 긴장하지 않고 슬로프를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이 아쉬웠다. 무엇보다 무서워하던 그 구간이 이렇게나 짧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서울로 돌아오는 셔틀에서 가만히 생각하건대 참 나다운 에피소드였다. 내 통제를 벗어난 사고가 늘 무서워서, 무슨 일이든 마음졸이고 고민하느라 진전속도가 느리다. 지금은 내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잘 가다가도 항상 멈춰섰다. 그 사이 함께 출발한 사람들은 자기 페이스대로 저만치 나아가 있다. 내가 한 번 경험할 때 두 번, 세 번씩 경험해서 경험치를 쌓았다. 두려움을 이기고 조금만 더 빨리 나아갔다면, 기껏 얻은 가속도를 초기화하지 말고 그냥 갔다면, 나를 조금만 더 믿었다면. 어찌할 수 없는 재난이 나를 휘두르게 두지 말걸. 두려움은 몸을 굳게 만들고 알아서 출력되던 절차기억마저 꼬이게 한다. 이렇게 휘청거리고 나면 역시 조심하길 잘했다며, 앞으로 더 긴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냥 앞으로 가도 괜찮았네, 너무 조심했네, 라며 후회한 경험이 이전에도 분명 있었지만 차라리 후회하는 것이 내게는 더 편한 상태로 맞춰진 것 같다. 물론 내가 조심했기에 피할 수 있었던 재난이 많겠지만, 멈춰서지 않아도 주위를 살필 방법은 많았다. 도저히 갈 수 없을 때, 그때 멈춰도 되니까, 조금만 더 가보자. 휘청거려도 되니까 조금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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