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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캥 Apr 06. 2020

이리조즈 핸드 로스팅

파나마 게이샤 에스메랄다 포르톤 47

생두로 처음 로스팅을 시작했을 때를 떠올린다. 핸드드립용으로는 라이트~시티 로스팅 정도가 적당하는 사실을 몰라 기름이 배어 나오고도 한참 후인 이탈리안 로스팅까지 콩을 태워먹어 그것으로 커피를 내려마시면서 '나는 직접 로스팅을 해서 커피를 마시는 우아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며 스노브의 정석을 보여줬던 때가 있었지. 물론 몇 모금도 못 마시고 다 하수구에 부어버렸지만 말이다. 


다행히도 시행착오를 계속 거쳐 현재는 배전도를 자유자재로 조절하고, 원두에 따라 적절한 배전도를 선택하여 즐길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 현재 에스프레소 머신 용으로는 시타 로스터기를, 핸드드립용으로는 이리조즈 핸디 로스터를 이용해서 로스팅을 하고 있다. 


에스프레소용으로 블렌딩하는 원두 이야기는 차후에 하기로 하고, 지금은 핸드드립용 로스팅에 대해서 얘기해보려 한다. 



어떤 취미이든 간에, 널리 알려진 정석적인 방법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골프나 테니스 같은 스포츠는 스윙의 자세가 있고, 현악기에는 보잉, 관악기에는 텅잉이 있다. 초반에 제대로 기본을 배우게 되면 독학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즐길 수 있다. 그 이후에는 자기 자신의 노하우를 만들어가는 과정인 것이다. 


뭔가를 그나마 빨리 배우려면 역시 현질이 최고다


그러나 초반에 선무당식으로 습득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스노브의 길로 들어선다. 마치 골프 1개월 차가 사람들 앞에서 빈스윙을 하고, 헬스 3주 차가 가슴에 힘을 주고 다니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술도 못 먹는 주제에 이런 적이 있어서


커피의 경우 스노브의 길로 빠지기 쉬운 취미인 것은 자명하다. 배전도나 드리퍼만 해도 여러 가지고, 에스프레소의 압력이 어떻고 수율이 어떻고.. 이렇게 입문은 쉬운데 공부할 것은 많으니 그저 취미인의 입장에서는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그러다가 한 가지 결론으로 이 모든 것을 정리했으니,


그냥 나에게 맛있는 것이 최고다


처음 커피를 공부하면서 느낀 점은 너무나도 많은 변수였다. 핸드드립에는 라이트한 로스팅, 에스프레소에는 시티~풀시티 더 나아가면 프렌치 로스팅, 이런 식으로 구분을 지어버리니 왠지 그대로 따르지 않으면 커피를 모욕하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육고기에는 레드와인, 생선에는 화이트와인 이런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타협을 좀 하기로 했다. 최고급 소고기를 미디움레어를 살짝 구워 즐기던, 웰던으로 바싹 구워 즐기던 개인이 행복하면 그게 가장 좋지만... 다만 '그래도' 좀 '제대로' 좀 '원두의 특색을 가장 잘 살릴 수 있게' 즐겨 보자는 거지.


사실 원두에 따른 로스팅 조절은 중요하다. '중요하다'라는 것은 각 원두에 가장 맛있게 느껴지는 배전도가 있다는 것이다.



로스팅을 시작해 보자. 내가 가장 아끼는 파나마 게이샤 생두를 선택했다. 발품을 팔고 공구 정보를 받아서 이름난 커피는 다 맛볼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가격은 최대 일반 브라질 원두의 30배가 넘어가지만, 분명 그만한 가치는 있다. (사실 그 이상이다)


프리미엄 커피 4대장(자메이카 블루마운틴, 파나마 게이샤 에스메랄다, 예멘 모카 마타리 사나, 하와이안 코나 팬시)


이리조즈의 최대 용량은 60g이다. 하지만 이건 비싼 거니까 아껴먹어야 하니 50g만 하자. 평소에 10g 기준으로 150ml를 내려먹지만 이건 비싼 거니까 7~8g에 120ml 정도만 내려먹는다. 50g을 저울에 잰다. 시중에는 커피 전용 저울도 있지만 그건 너무 간 거 같으니까 그냥 계량 저울을 이용했다. (쓸데없이 비싸다)

 

결점두가 없다는 것은 큰 장점이다. 그래 이건 비싼 거니까.


이리조즈 등장, 일본어로 잘 볶인다는 뜻이란다. 역시 이 시국에는 MADE IN JAPAN. 등소평은 검은 쥐든 흰 쥐든 쥐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라고 했지. 어그로는 여기까지.


이리조즈 되시겠다.


밑의 구조로 인해 고른 열전도와 배전이 가능하다(고 쓰여있다)


생두 투입 후 가열, 예열 따윈 필요 없어 난 바쁘단 말이다.


사실 로스팅의 노하우는 별다른 게 없다. 그저 타이머를 틀어놓고 5분까지는 별생각 없이 흔들기만 하면 된다. 1차 팝이 이루어지려면 아직 멀었다. 그저 필요한 건,


......



시나몬 로스팅


대략 3~4분 정도 지나면 연기가 나면서 시큼한 향이 올라온다. 이때의 색은 진한 노란색을 띠는데, 시나몬 로스팅이다. 이 로스팅에서 커피를 내리면 강렬한 산미를 느낄 수 있는데, 지금도 미국 서부에서는 이렇게 커피를 즐기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레드 데드 리뎀션 2의 커피, 지금도 저 분위기를 재현해보고자 저 정도 크기의 스탠 컵을 찾아다니고 있다.


게이샤의 산미는 너무나도 훌륭하지만, 가끔 너무 과할 때가 있으니 미디엄과 시티 사이의 배전도를 목표로 로스팅을 계속 진행하였다. 대략 5분 30초쯤 1차 팝이 시작되며, 흔드는 속도를 좀 더 빨리하고 불을 서서히 줄이면 배어 나온 기름이 터지는 2차 팝이 진행되기 전에 로스팅을 마무리한다. 불을 끈 후에도 원두의 잔열에 의해 로스팅은 계속 진행되니 바로 식히든지, 미리 불을 꺼서 잔열로 로스팅을 진행할 지 선택해야 한다.


6분 30초쯤 로스팅 마무리


로스팅을 하다 보면 채프가 많이 흩날리는데, 국산 제품 중에는 구멍에 뚜껑이 달려있어 채프가 날리는 것을 방지하는 기능이 있는 것도 있다. 그러나 채프가 안에서 타버려 풍미에 영향을 줄 수 있기에 권장하고 싶진 않다.


채반에 부은 후 살살 흔들어 식혀준다. 채프를 걸러내는 역할도 한다.


커피가 식으면 아로마 밸브가 있는 봉투 안에 보관하거나, 그냥 밀폐용기에 보관해도 된다. 커피에서 나오는 가스가 산패를 방지해준다. 보통 3~5일 후에 디개싱이 완료된 후 마시면 좋으며, 21일~한 달까지 맛이 유지된다. 사람에 따라 디개싱 일주일, 기한 두세 달까지 괜찮다는 사람도 있지만 결국은 취존.


회식의 끝은 출근이요. 로스팅의 끝은 청소이다.


커피가 식는 동안 채프를 치우고, 후드의 기름때를 닦아준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레인지 후드에 부착된 채프와 커피 오일 성분이 후드를 오염시킨다. 



손도 많이 가고 상황에 따라선 귀찮을 수도 있지만, 모든 절차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후 기다림의 시간을 거쳐 즐기는 잘 내린 커피의 향과 맛은 그 모든 수고로움을 잊게 해 준다. 풍요로운 삶이 뭐 별거 있나. 행복을 느끼는 다양한 방법 중 하나를 알고 있다는 것만 해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다음 취미 예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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