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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권 Feb 17. 2023

있어도 없는 거 같은

글을 쓰다 뒤를 잠시 돌아보았다. "옷 정말 없구나." 외출 준비를 하고 어떤 옷을 입고 나갈지 잠시 고민하지만 역시 "옷이 없어."라고 혼자 중얼거린다. 외출을 하든 청소를 하는 시간이든 지나가면서 보면 분명히 옷가지는 많아 보이는 데 왜 입고 나가려고 하면 없는 걸까. 마치 이집트 신기류 앞에 오아시스가 나타났다 없어지는 듯한 이런 자연 현상은 매일 반복되고 있다. 그럴 때마다 "이번 주말에 옷 사러 나가야겠어."


우리는 늘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옷이 정말 없다고. 그래서 외출할 때는 '거지 같은 옷.'을 간신히 챙겨 입고 나간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렇게도 마음에 드는 옷이 없고, 또 상하의가 자연스럽게 잘 어울리는 날이 거의 없는 걸 발견한다. 나는 '왜 옷이 없는 걸까.'라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옷걸이에는 분명히 옷들이 걸려 있고 가끔 지나가다 보면 향긋한 라벤더 향도 나고 나름의 외출준비를 애타게 기다리는 옷들이다.


잠시 질문 하나만 하고 싶다. "혹시 자신이 옷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 손들어보세요." 작은 강연에서 참석한 젊은 청년들에게 물었다. "아니면, 옷은 있는데 입을 옷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은요?" 20여 명 대부분이 손을 들고 크크크 웃는 모습이었다. '여러분들은 그냥 옷이 없어, 아마 평생 없을 수도 있어.' 작년에 샀는데 벌써 사이즈가 안 맞기도 하고, 오랜만에 입고 외출했는데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유행이 지난 걸 확인하면서 '내 옷장에 옷은 쓰레기다'라고 혼자 중얼거린다.


아내와 리아를 데리고 오랜만에 처갓집에 다녀왔다. 아니, 나만 다녀왔고 함께 갔다가 회사 일 때문에 나만 먼저 돌아왔다. 대충 3주의 시간 동안 떨어져 있기로 했는데 아직도 1주일이 남았다. "뭐랄까, 그래도 함께 지내던 시간이 있기 때문일까." 이제는 슬슬 외롭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어젯밤 자기 전에 "사랑해, 보고 싶어."라고 카톡을 보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냥 한 말이 아님을 알게 된다. 진심이라고.


늘 옆에 있는 것들은 쉽게 그 소중함을 잊게 마련이다. 누구든지 그럴 수 있고, 망각과 익숙함에 생각의 중심을 놓쳐버릴 수 있다. 광고 속에서 나오는 카피처럼 '함께 있을 때 잘해'라는 글 자는 요즘 나를 두드리는 그런 글이 되어버렸다. 정말 익숙한 무언가가 느닷없이 그 자리에 없을 때 처음에는 모른다고. 익숙해지는 시간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빈자리의 소중함을 알아가기에 시간은 조금이면 충분하다. 그런 게 삶의 이치인가 보다.


늦게 퇴근하는 때가 많아서 늦은 시간 티비를 볼 때면, 사건 사고 내용으로 대부분이 채워진 뉴스는 보는 편이다. 뭐 좋은 이야기, 그리고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그런 이야기도 많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 하루 내내 일 다운 일을 했는지 퇴근하고 현관문을 열자마자 소파에 허리를 깊숙이 담가버렸다. 그리고 오랜 시간 해오던 루틴대로 리모콘을 들어 티브이를 켜본다. 뉴스가 나왔다. "이런, 저녁 뉴스를 볼 만큼 늦게 퇴근한 건가."라는 중얼거리며 남은 저녁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잠시 티비를 지켜본다.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다. 뉴스인줄 알았는데. 김영철이 경기도에 있는 어느 시골마을 돌아다니며 마을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회식 벽돌로 쌓인 벽을 사이에 둔 골목길을 가는데 저쪽에서 할머니 한 분이 조그만 텃밭에서 상추를 뜯어내고 있었다. 김영철은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할머니의 사연을 들어보는데, 대충 이랬다. 얼마 전에 할아버지가 죽고, 아이들도 다 장성해서 이제는 혼자 살고 있다는 할머니 사연이었다.


혼자서 텃밭을 일구며 웃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에는 외로움이 남아 있지는 않았다. 호기심을 자극하고 이야깃거리가 필요했는지 김영철은 이렇게 물어봤다. "할머니 혼자 지내시느라 힘들지 않으세요?", "아니, 바깥사람도 죽고 애들도 다 나갔지만, 죽기 전까지 정말 잘 살았거든, 지난 시간을 후회 없이 좋게 지냈어." "잘 살아왔으니 이제 잘 죽는 일만 남았네, 그거면 충분해"라고 할머니는 말했다. 그러고는 작은 부록을 남겨주시듯 이렇게 말하며 순도 백 퍼센트의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한다. "모든 건 잘해야 할 때가 있어, 그때를 모르고 남기면 후회하고 살아야 해. 다행히 나는 지금 너무 편안하네. 잘 살았으니까."


어떤 걸 보고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잘 먹고 잘 자고, 그리고 잘 웃으면 그게 바로 잘 사는 걸까? 나는 할머니와, 내 뒤에 뒤 엉켜 걸려 있는 옷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모든 게 다 있을 때는 잘 모르는구나." 저렇게 많은 옷도 막상 입고 나가려고 하면 마치 옷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사람도 함께 있을 때는 그 존재의 가치를 잊게 되지만, 막상 그 빈자리를 느끼면서 존재의 소중함을 알아가나 보다. 할머니의 "얼굴 찡그리지 마 주름살 생겨, 그냥 모든 걸 있을 때 잘하면 돼."라는 말 한마디가 기억 속에 남는다.


함께 있을 때는 잘 몰라. 그런데 잠시 떨어져 있는데 갈비뼈 하나가 빠져나간 것처럼 외롭다고 느낀다면, 그건 그만큼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야. 그런데, 이론은 잘 알겠는 데 막상 현실에서는 잘 안 되는 게 익숙함이 주는 망각이다. 그래서 우리는 양보를 못해 서로 다투기도 하고, 다시는 안 볼 거처럼 절교를 선언하기도 한다. 물론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취하는 언행이 모두 나쁘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마치 옷장에 옷처럼 많이 있어도 있는 것처럼 느끼지 못하는 상황은  그렇게 나를 감추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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