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부터 부모의 인생 절반 이상은 아이를 향하게 된다. 일상에서 많은 것들을 포기하며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비슷하다. 늘 함께 있어줘야 하고 보살피며 아이 하나를 삶의 중심에 둔다. 생각해 볼 문제라면, 이런 행동은 지극히 위험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쉽지 않다. 조금씩 자라면서 유치원이 되는 아이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무언가를 스스로 할 수 있게 되고, 초등학교 중학교에 가면서 인간관계나 주변의 환경들을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어간다.
그렇게 성인이 되면서 아이는 세상을 향해 나가게 되지만, 그때까지도 부모는 아이를 하나의 성인으로 바라보는 데까지 주저하게 된다. 아직까지도 아이를 통해 자신의 행복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은 그렇다. 그렇게 부모는 아이를 바라보지만, 아이는 세상을 바라본다.
“여보세요~?”
7호선과 4호선 환승구간은 자주 지나가는 곳이다. 늦은 오후, 한가한 지하철이라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내 귀는 옆자리 대학생 목소리에 귀 기울여졌다. 정적을 깨는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했다. 첫마디만 들어서는 오늘 하루도 별로 좋은 일이 없었는지 왠지 모를 짜증이 배어 있는 목소리였다. 몹쓸 내 버릇이 작동하며 귀를 세웠다. 다소 귀찮아하는 목소리는 내 귀에 대고 말하는 듯하는데,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응, 엄마 왜?”
“오늘 늦게 들어올 거니?”
“어, 저녁에 들어갈 건데 왜?”
“저녁에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저녁에 늦지 않으면 저녁 같이 먹자.”
“아니, 없는데?”
“그러면 너 좋아하는 팽이버섯 넣어서 된장찌개 해둘게 응?”
대화 내내 이 여성분의 짧은 말에는 “왜, 왜, 왜”와 같은 아주 절제되고 기름기 없는 단어 몇 개로 의사전달만 한다. 마치 내가 모르는 암호가 새겨 있는 듯했다. 세상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해 주는 그분 ‘엄마’와 통화하는 모습이라서 그런가? 나는 평소 같았으면 “좀 조용히 해주시겠어요?”라고 말하는 타이밍인데 그저 그녀들의 대화에 빠져든다. “어머니가 준비해 줄 된장찌개는 짭조름할까 아니면 연하면서도 시원한 맛일까”라며 혼자 뜨거운 뚝배기를 상상하게 되었다.
대중교통에서 타인의 편안함도 중요하게 여겨지는 때, 지하철 안에서 자기 편한 맛으로 쉽게 떠드는 사람은 드물다. 그렇지만, 엄마라는 한 마디 정도라면, 조용했던 지하철 안이 조금은 시끄럽더라도 이 정도는 이해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처음에는 불편했지만, 오늘은 늦지 않고 집에 돌아가서 엄마가 해주신 따뜻한 저녁과 함께 평온한 하루를 마무리하겠지.
부모라는 이름을 알아가기는 쉽지 않다. 자신이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은 사실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이를 잉태하는 순간부터 부모로서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데, 그것은 경험만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간다고 하겠지만, 하나의 인생을 만들어주는 거라고 생각한다면 정말 대단한 삶을 살고 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게 부모이든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든 모든 면에서 자신의 것을 떼어내어야 하는 그런 모습이기에 아름다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