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어른이 되어 간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해졌다.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풀어썼던, 가정을 꾸리고 아이의 성장을 지켜볼 수 있는 것이 어른의 다른 말이라고 해도 될까.
어른이란 이름을 다양한 각도에 바라보는 다양성을 고려할 때 두 가지의 정의를 내려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생물학적으로 탱탱했던 60조 개의 세포가 나이를 먹어 제 기능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둘째는 내적 성숙함을 말하는 것으로, 자신이 하는 행동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고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것을 어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두 개의 어른을 대표하는 언어를 보면서 어느 정도 가깝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가끔은 나 역시도 편의점에서 막걸리를 구입할 때 내미는 주민번호의 숫자를 보며 어른이 되었다는 이상한 상상에 잠기기도 하지만, 실제로 내가 어른이 되었는지는 내 스스로 정의하기는 힘들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어른임을 말할 수 있는지, 또는 내가 누군가를 어른이라고 느끼면서 상대를 존중하기도 하며 때로는 얻을 수 있는 지적 자산에 관한 욕심을 부리기도 하는지, 사실 주관적인 평가의 잣대만이 시대에 존재한다. 어렸을 때 몸무게에서 성인이 갖추어야 할 성장이 이뤄지고, 또 성인식을 끝내면서 어른이 되었다는 자평을 내놓기에는 우리의 성숙도는 어느 누구의 저울에 올려져도 숫자로 계량화하기는 힘들다.
사전에 나온 정의는 더 간단하다. '다 자란 사람'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어른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기에 무리가 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사회 속에서 말하는 어른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본다면, 다 자란 사람이라는 간단한 형용으로 정의하기 힘들다는 논쟁에 이의는 없다.
Photo by@paris_shin. 한상권
"화내는 사람이 언제나 손해 봅니다"
"화내는 사람은 자기를 죽이고 남을 죽이며 아무도 가깝게 오지 않아 늘 외롭습니다"
김수환 추기경
나는 화내는 사람은 자기를 죽이고 남을 죽인다는 얘기에 깊은 공감과 변화의 씨앗을 찾을 수 있었다. 사람은 격분하는 순간 자신이 하는 행동과 말을 정상적 기준과 비교할 여력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한마디의 힘은 말 그대로 어른 이기데 깊이가 다르지 않을까. 김수환 추기경과 같은 가정에서는 대소사를 책임지고 누구보다도 깊은 생각으로 집안을 책임지는 어른이 있듯, 사회에서도 대중의 추앙을 받는 현자와 같은 어른 또한 존재한다.
우리 시대의 어른이자 빈자와 약자의 희망이자 또 다른 어른들의 스승인 이유는 이렇게 간단하다. 같은 말이지만 그 깊이에서 오는 통찰력과 세상을 읽는 경험의 조언들은 한 마디로 말하기 힘들지만 우리를 움직이게 만든다. 이렇듯 삶을 영위하기 위한 영혼들의 안타까움을 밝혀주는 역할을 하는 선구적 어른은 우리에게 언제나 환영받는다.
나는 예전에 사회에 첫 발을 내딛고 첫 월급을 타는 날 그날 스스로 느낀 적이 있다. 나도 어른이 되었구나 라고 그렇게 행복에 겨운, 드디어 나도 다 컷구나 라고 목에 힘을 주었던 적 있다. 그렇다.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얻어낸 성과에 대한 자립심은 어른이 되어가는 계단의 첫 번째가 되기도 한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첫 월급의 의미를 알아차린 것도 하나의 성숙의 단계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시간이 지나며 그 성숙의 깊이는 시간의 쫓김 속에서 제대로 된 방향을 잃기도 한다. 그것을 방황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의 하나라고 본다면 마다해가며 지름길로만 가려는 욕심은 지나칠 수도 있다. 사전에서 말하는 다 큰 사람이던, 심리적 내적 생각의 거침을 보듬어 줄 수 있는 성인이 되었건, 어른이라는 말 자체는 나에게 어른스럽게 행동하게 하는 철학적 의미가 담겨있음 분명해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