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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 Jan 13. 2019

발목을 잡는 것들

시도할 기회가 주어진 이 순간에 집중하기


인생에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계속 하리란 보장은 없다.


어떤 순정만화에서 “인생은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그 의미를 갖는다”란 대사도 있다던데. 나의 경우 이 예측불허함은 나이를 먹을수록 대부분 나쁜 쪽으로 가까워졌다. 급작스레 상사한테서 불똥이 튄다거나, 선임의 텃세같은 것들. 좋아하는 사람들과 속해 있던 회사 팀이 분해되기도 했고.. 생이 좀 무의미해도 괜찮을 텐데 말이다.


검도 덕후로서의 삶도 비슷하다. 덕질을 꾸준히 하고 싶지만, 도장의 수련 도반들이 좋은 사람만 있으리란 보장이 없고 건강하던 몸이 언제 어떤 이유로 부상이 생길 지 알 수 없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수련을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이 눈앞에 펼쳐진다. 내 주변에서는 나의 오랜 검도 덕질메이트인 애인의 경우가 이렇다. 애인의 검도인생은 여러 예측불허의 힘에 힘입어, 내 수련 연차의 두 배 이상인데도 2년 이상 연이어 수련한 적이 잘 없다. 그런 애인이 2017년의 겨울, 건강을 조금 추스른 후 4단 승단심사에 도전하게 됐다. 


그가 승단심사 때 도울 수 있는 건 해주고 싶었다. 내가 승단준비를 할 때 그가 많이 도와줬기 때문이다. 내가 주중에 잦은 야근으로 도장수련을 거의 못 할 때면 주말의 주차장에서 따로 검법연습하는 게 데이트였으니까. 주말에 목검을 들고 모인 두 남녀. 거듭된 자세연습, 잘 되지 않는 부분을 반복하다가 찔끔 울어버린 나, 그런 나에게 한번 더 동작을 연습시키는 애인. 우리의 데이트는 좀 궁상맞은 데가 있다.


나의 (쪼잔한) 선생님 겸 애인은 본인의 승단심사를 착실히 준비해나갔다. 주중에는 일하느라 바빠서, 혹은 연습 시간이 난다 해도 컨디션이 그리 좋지 않아서. 연습이 잘 될 이유보다는 안 될 이유가 더 많은 나날. 그래도 그가 심사에서의 체점기준이 되는 포인트는 잊지 않고 수련해나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칼을 맞댈 때의 거리라던가, 좌우머리치기의 칼 각도같은 것들. 어느덧 심사 날짜가 다가왔고 우리는 죽도와 호구, 목검 등을 챙겨 심사장으로 향했다. 


검도에서 1단과 2단이 수련자로서의 느낌이라면 3단부터는 도장에서 어느 정도 연장자의 반열로 올라선다. 3단부터는 부사범급, 4단부터는 사범급이 되기 때문에 합격 기준은 높고 합격자 비율도 낮다. 4단심사 정도가 되면 각 시도 검도회가 주관하는 큰 규모의 심사에 참여해야 하는데, 서울시만 놓고 보면 단 별로 100명 넘는 인원이 응시한다.


예의 ‘정기 승단심사' 글씨가 떡하니 적힌 큰 플랜카드. 응시자들을 평가하는 심사위원(7단 혹은 8단 분들)들과 진행요원(이분들도 5단 이상인 경우가 많다) 분들이 자리를 채운다. 심사가 진행되는 동안 근엄한 표정을 한 채 채점지 앞에서 펜을 끄적이는 심사위원들의 손끝은 바삐 움직일 터였다. 이렇게 심사장에는 장소와 사람이 주는 특유의 압박감이 있다. 평소에 아무리 대범한 사람이라도 긴장감이 높아질 수 밖에. 


심사는 2단계로 진행됐다. 먼저 1차심사에서는 상대의 좌우머리를 연달아 친 다음 정면 큰 머리치기 동작으로 마무리하는 연격, 여기에 적절한 기회와 자세로 상대에게 유효타격을 성공시켜야 하는 대련까지. 1차심사의 이 두 과제를 잘 수행해야 2차심사 과목인 검도의 본과 본국검법 등에 응시할 수 있다. 1차심사에 대한 채점은 현장에서 빠르게 이뤄지므로, 잠깐의 쉬는 시간 이후 진행요원분들이 1차심사 통과자들의 번호를 외칠 터였다. 


내 검도 덕메는 이날따라 심하게 긴장했던 모양이다. 안 그래도 덤덤한 표정이 더 무미건조하게 굳은 데다가 손에서는 식은땀이 났다. 게다가 그날따라 승단심사에 참여하는 심사위원분들 중 8단 고단자들이 많았다. 심사자들 응원차 각자의 도장에서 구경온 사람들이 관중석에서 술령였다. 


“(보통 7단 선생님들이 많이 오시는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8단 선생님들이 많이 오셨지?” 

“오늘 1차 심사의 커트라인이 평소보다 높을 것 같은걸” 


엄한 호랑이 선생님들 앞에서 더 마음이 움츠러드는 사람들. 8단 선생님이 많건 적건, 그에 상관없이 심사는 정각이 되자 정확하게 시작됐다. 


“기세와 적극적인 공격이 조금 부족한 느낌인데...” 1차 심사를 치르는 애인을 보며 살짝 불안했다. 항목 별로 정리된 심사 기준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심사를 꾸준히 봐왔거나 도장 관원들의 심사 현장에 응원하러 간 사람이라면 대충 감이 온다. 수련 양에서 나오는 충분한 기세, 공격에 필요한 적정 거리를 파악하는 감각, 올바른 자세 등. 그런 자잘한 디테일이 맞춤양복의 옷태를 결정하듯 자세에서 풍기는 전체적인 아우라를 결정한다. 


애인의 경우는, 평소의 박력은 어디가고 기능심사 때 칼을 내려치고 앞으로 나가는 모습이 왠지 ‘나풀나풀'해서 쑥쓰러움으로 무장한 사람 같았다. 응시자 전원의 1차 심사 종료 후 쉬는 시간. 휴식이 끝나자마자 1차 심사 통과자들의 명단이 호명됐다. “24번! 27번! 36번!.....” 불리는 번호들 사이로 불리지 않는 응시자들의 웅성거리는 소리. “에고…” 나 또한 안타까움에 외마디 말이 새어 나왔다. 애인의 응시번호가 없었다. 


“고생했다. 아쉽겠네..” 

“허허 그러네 떨어졌네." 


본인 짐을 챙기며 실없이 웃으며 나온 애인. 그 모습에 심사에 두 번 떨어졌던 내 기억도 겹쳐졌다. 나는 “일이 이렇게 많은데 이 와중에 어떻게 승단준비까지 제대로 하냐” “진짜 힘들어" 이러면서 울었는데, 이 사람은 이럴 때 잘 울지 않는다. 하지만 느끼는 감정은 비슷할 테니까. 터덜터덜 심사장을 빠져나오는 이 사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어쩌지 못 한 순간들과 애인이 어쩌지 못 한 순간들이 같이 떠올랐다. 체력만 받춰줬다면 1차 심사 정도는 무난히 통과했을 텐데, 대상포진 등 면역력이 떨어져 생긴 병들을 비껴갈 수 있었으면, 스트레스를 덜 받았으면… 그렇게 ‘oo 하지 않았으면’ 류의 생각을 해보았지만 우리 인생에 발목 잡는 것들은 항상 있다. 그래도 그와중에 시도할 기회가 주어졌음을 감사히 여기자. 다음에는 좀더 잘 할 수 있겠지. 연습을 다시 해서 또 이 자리에 서보자, 그런 마음이 들었다. 


심사장을 완전히 빠져 나오니 저녁시간이었다. 공기는 차갑고 그날따라 노을이 선명하게 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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