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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골짜기 혜원 Mar 02. 2018

술벗 달님과 달빛에 취하다

가로등 백만 개 부럽지 않은, 대보름 달님 아래서 혼술 

하늘이 환하다. 하늘을 본다. 달이 떴다. 둥글게, 밝게. 이 작은 산골이 은은하게 환하다. 촉촉한 듯 따스한 듯 온 누리 감싸는 저 달빛에 나도, 산골짜기도 행복하게 젖는다.  


촉촉한 듯 따스한 듯 온 누리 감싸는 저 달빛에 나도, 산골짜기도 행복하게 젖는다.


날짜를 보니 보름이다. 하늘은 정말 거짓말이 없구나. 끝 간 데 없이 정직하구나. 이다지도 밝지 않았다면 굳이 달력을 보지 않았을 텐데 정확하게 보름인 것이다! 가로등 하나 없이 깜깜한 이곳. 달빛만으로도 환하디 환하다. 가로등 백만 개를 갖다 놓은들 너무 밝지도 어둡지도 않게 온 세상 은근하게 비추는 저 달빛을 당할 수 없으리….


 달님이 슬그머니 보이던 해질 녘부터 달님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죽 행복에 물들었다.


날이 찬데도 자꾸만 마당에 나간다. 둥근 달님이 슬그머니 보이던 해질 녘부터 늦은 밤까지. 고개를 들어 달님을 보고 또 본다. 그냥 좋다. 마냥 좋다. 곱게 둥그레한 달님이, 달님이 푸근히 보듬어주는 이 세상이. 


달빛처럼 은은한 때깔 지닌 막걸리 한 사발 손에 들고 달님 아래 선다. 술잔에 비친, 술 위에 뜬 달님이 보인다. 아주 작디작게 술잔 안에 들어온 달님, 냉큼 마셔버린다. 달님이 내 안에 들어왔다! 잠시나마 내 마음도 환해진 기분. 달님 아래 술 한잔 들이키자니 뭘 모르는 나도 ‘이백’이란 옛시인이 먼저 떠오르네. 


달님 아래 혼자 술을 마신다. 술잔에 비친 달님까지도.

<월하독작 1>

꽃 사이에 술 한 병 놓고 

벗도 없이 홀로 마신다

잔을 들어 밝은 달 맞이하니

그림자 비쳐 셋이 되었네

달은 술을 마실 줄 모르고

그림자는 그저 흉내만 낼 뿐

잠시 달과 그림자를 벗하여

봄날을 마음껏 즐겨보노라



(…)

정에 얽매이지 않은 사귐 길이 맺어

아득한 은하에서 다시 만나기를

_이백


뭔 일이래. 이 시를 적으면서 마음으로 읊는데 너무 찡해. 시를 잘 몰라서 시에 감동받는 일 드문데, 흠흠. 다시 또 막걸리 한 사발 따르고, 보름달처럼 둥근 빵 하나 꺼낸다. 다른 때 같음 막걸리 안주로 절대 어울리지 않을 이 빵이 오늘만큼은 막걸리 벗으로 안성맞춤일세.


보름달처럼 둥근 빵 하나가 오늘만큼은 막걸리 벗으로 딱일세!


산골 살면서 달빛이 지닌 힘을 사무치게 느낀다. 불빛이라곤 없는 곳에서 달빛이 얼마나 넓고 깊게 드리울 수 있는지, 달이 없을 때 밤이 얼마나 칠흙같이 어두운지도. 달이 뜬 날은 정말로 손전등이 필요 없다. 달빛이 넓고도 깊게 드리우니 그 빛에만 의지해도 충분히 걸을 수 있다. 오히려 너무 밝아서 술기운 오른 발간 얼굴이 달님 앞에 부끄러울 지경. 


옛날에, 옛날에 달빛 따라 산도 타고 밤길도 걷고 했다던 조상님들 삶이 실제였다는 걸, 가로등 없는 산골에 살면서, 그 길을 오로지 달빛 하나만 의지해서 걸어 보니, ‘확실히!’ 믿을 수 있게 됐다.  


옛날에, 옛날에
달빛 따라 산도 타고 밤길도 걷고 했다던
옛분들 삶이 내게도 왔다


산골 살면서는 아침에도, 낮에도, 밤에도 하늘을, 하늘만 본다. 풀도 나무도 꽃도 날마다 바뀌지는 것 같지는 않은데 하늘만은 날마다 바뀐다. 햇빛이 내리쫴도 하늘이 궁금하고, 어둑어둑 흐릿해도 하늘이 궁금하고, 비가 쏟아져도 하늘이 궁금하고, 완전히 깜깜한 밤에도 하늘이 궁금하다. 그리고 오늘처럼 마당에 있는 불을 켜지 않아도 둘레가 너무 환한 날도 하늘이 궁금하다. 그래서 오늘 하늘을 봤고, 너무 크고 둥근 달님을 봤고, 보름인 걸 알았다. 


달님은 넓디넓은 세상을 비추는 데 그치지 않고 좁디좁은 내 마음도 환하게 비춰준다. 마치 마음 엠알아이(MRI)라도 찍히는 듯 숨겨둔 내 마음이 달님 앞에 싹 다 드러난다. 부끄럽긴커녕 푸근하고 따스하다. 달님은 그게 뭐든 다 받아주시니까. 


서울 살 때 내가 하늘을, 그것도 밤하늘을 본 적이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없다, 없다. 밤은 늘 급하고 바빴다. 술집 찾아다니느라, 야근 마치고 퇴근하느라 앞만 보았다. 앞만 볼 수밖에 없었다. 


서울 살 때 내가 하늘을, 그것도 밤하늘을 본 적이 있었던가?


달님이 내 마음을 너무 환하게 비춰주시는 바람에 소원을 빌었다. 하나는 세상을 위한 것. 또 하나는 나를 위한 것. 이 순간만큼은 술벗 열 안 부럽다. 


오늘, 도시에도 보름달은 떠 있겠으나 아스팔트 빌딩 사이로 보이는 달과 산등성 너머로 보이는 달은 분명 다를 테지. 내가 지금 달에 취한 건가 술에 취한 건가. 갑자기 옥상달빛 노래가 생각나네. “난 늘 응원해, 수고했어 오늘도~♪” 아무래도 술벗 두고 먼저 자야겠다. 달님은 그래도 상관없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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