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의 해 2022년, 우보천리를 되새겨 준 책 ‘걷기의 기쁨’
시골에 살면
논두렁 밭두렁이며 산길 들길 따라
걷고 또 걸을 줄 알았다.
아니었다.
어쩌다 한낮에 걸을라치면
논밭에서 일하는 분들이 어디 가느냐고 묻곤 한다.
땀 흘리는 분들 앞에서
‘그냥 걷는다’ 하면 왠지 죄송하고
‘일 보러 간다’는 거짓말은 싫어서
어느 때부턴가 마을 길은 걷지 않게 되었다.
서울에 살 때처럼
어둔 밤에라도 나가 볼까 싶지만
가로등이 없거나 드문 산골 밤길은
칠흑처럼 깜깜하다.
안 그래도 겁 많은 나는
혼자 나설 용기를 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산이라도?
에고야, 산골짜기랑 잇닿은 산길은
사람 발길이 거의 없는지라 야트막해도 험하디험하다.
거친 길이야 헤쳐 나갈 수 있다지만
멧돼지라도 만날까(확률 높음!) 겁나서
도저히 홀몸으로 오를 자신이 없다.
혼자 걷기를 참 좋아했던 나는
천혜의 자연에 둘러싸여 살면서도
자의 반 타의 반 ‘걷는 행복’에서
멀어졌다. 안타깝게도, 슬프게도.
그런 내게 뚜벅뚜벅 다가온 책 한 권, <걷기의 기쁨>.
“걷는다는 것은 살아 있음의 박동이다. 두둥, 두 발이 지구북을 두드린다. 심장이 뛴다. 살아 있다. 걸어야겠다._(15쪽)”
머리말 마지막 글귀가, 이 짧고 간결한 문장들이
내 심장을 톡톡 건드린다.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부터 걷고 싶은 마음이 생기니
난 정말 걷고 싶긴 했나 보다.
“내가 걸어온 길이 잘못 걸어온 길이 아닌데도, 마음 한구석이 늘 아쉽고 허전하며 외로운 것은 웬일인가. 내가 꿈꾸었던 나의 모습, 나의 꿈에 닿지 않았음인가. 그럼에도 가야 하는 것이 삶의 길이다.”_(64쪽)
“걷기는 글쓰기와 닮은 데가 있다. 뚜벅뚜벅 한 땀 한 땀 온몸으로 스스로 다독이면서 나아가야 하는 것이 그렇다. 걸어간 궤적과 지나간 자취를 스스로 갈무리해야 하는 것도 닮은 꼴이다.”_(92쪽)
‘걷기의 기쁨’이라는 제목은 그 품이 참 넓다.
걸음마의 비밀부터 길의 어원과 역사, 천태만상 걸음걸이, 돌아가는 길 황천길,
영혼의 순례길, 살아가는 길, 걷고 싶은 온갖 아름다운 길….
‘걷기’라는 짧은 말 속에 이토록 깊고도 너른 이야기가
담겨 있다니, 담을 수 있다니.
재미와 놀라움과 흥미를 안고 ‘책 읽는 기쁨’을 마음껏 즐겼다.
“길에는 노래가 있다. 노래가 있어 길은 길다워진다. 노래는 길을 파고들고, 길은 노래를 불러낸다.”_(76쪽)
6장 ‘길의 노래, 길 위의 시’은 물론이고
장마다 노래와 이어진 글이 많은 것도 마음에 아주 쏙 들었다.
(술 한잔 들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나니.^^)
사는 ‘길’에 늘 있었고 꼭 있어야 하니까, 노래는!
그걸 놓치지 않고 ‘글’로 붙잡아 준 글쓴이에게 고맙다.
“우보천리(소 걸음으로 천 리를 간다)라 했다. 어슬렁어슬렁, 뚜벅뚜벅 가다 보면 어딘들 못 갈까. 우보천리는 우시호행으로 이어진다. 소처럼 신중하게 관찰하되, 결정을 내리면 호랑이처럼 단호하게 실행에 옮긴다는 뜻이다. 말을 뒤집어 호시우행이라 하면 어떤가. 호랑이의 눈빛을 간직한 채 소걸음으로 간다! 이거다. 호랑이의 날램에도 소의 덕성을 겸비하면 안 될 일, 못 할 일이 없을 것이다.”_(64쪽)
“그렇게 사는 거다. 주저하고 머뭇거리고 갈팡질팡할 필요 없다. 자기의 보폭만큼, 걸을 수 있는 만큼, 가슴이 뛰는 대로.”_(152쪽)
2022년은 소의 해.
급하지 않고, 쫓기지 않으면서
무겁지도 서투르지도 않게
어슬렁어슬렁 소처럼 천천히 걷고 싶다, 살고 싶다.
책을 덮으며 노래 하나가 무척 당긴다.
이 책에서 무려 3쪽에 걸쳐 이야기가 펼쳐진 god의 ‘길’.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곳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오늘도 난 걸어가고 있네…ㅠㅜ”
첫 소절이 흐르자마자
뜨거운 눈물방울이 뚝뚝 뚝.
술 한 모금 얼른 털어 넣고 몸에서 빠져나간 액체를 채운다.
바로 눈물 뚝!
더 울면 서러워진다.
여기까지가 딱 좋다, 마음을 비우는 맑은 눈물은.
노래를 부르고 술을 부르고
잘 걸으며 잘 살고 싶은 마음까지 한 아름 불러일으켜 준 책.
<걷기의 기쁨> 덕에 책 읽는 기쁨을 넘어 사는 기쁨까지 누렸다.
책에서 내 마음을 꼭 붙잡았던 어느 글귀처럼
'걸을 수 있는 만큼, 내 보폭만큼, 가슴이 뛰는 대로'
그렇게 살고 싶다. 살아야겠다.
이제는, 이제라도, 꼬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