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늦어도 괜찮아, 괜찮아…’
가을비 아스라이 내리던 날, 양파를 심었다.
오늘 이른 아침부터 비가 내렸으니, 어제쯤 심었으면 딱 좋았을 것을. 어제 그제 치러야 할 중요한 일정이 있어서 도저히 자연의 시간에 맞출 수가 없었다.
양파 모종 사러 장으로 나가는 길. 어느 밭엔 양파가 가득 심어져 있고, 또 어느 밭엔 양파 심을 모양이 분명한 구멍 숭숭 뚫린 비닐 밭이 보이고, 다른 밭에선 비옷 입은 사람들이 열심히 양파 모종을 심고 있었다.
양파 이파리가 하늘거리는 어느 밭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
심고 나서 물 흠뻑 먹어야 하는 양파들이 하늘하늘 내리는 비를 좋아하는 게 느껴진다. 자연의 흐름에 맞춰 양파 심느라 애썼을 어느 농부님들이 이 비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을 얼굴도 떠오르고. 양파 심고자 비닐만 씌운 어느 밭을 지나칠 땐 내 맴이 다 안타깝다. 저 밭 꾸리는 농부님, 이 비에 맞춰 양파를 심지 못해 얼마나 애달플까….
자주 가던 가게에 가서 양파 모종 300개쯤 사서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땅에 심었다. 비옷까지 입고 밭에 서다니, 나에게 참 오랜만에 벌어진 일.
비까지 맞으며 일해야 하나, 첨엔 좀 투덜대기도 했지. 그렇지만, 이 비를 그냥 보낼 수 없다는 우리 집 텃밭지기님 마음을 내 어찌 모른 척할 수 있으리오.
세찬 비가 아니어서 비 맞으며 일하는 기분이 은근히 시원하고 좋다. 땅이 촉촉해서 심기도 수월하고. 삼백 개 좀 넘는 양파 모종, 땅으로 보내는 시간은 한 시간도 채 안 걸린다.
더 심을 걸, 하는 아쉬움이 밀려들지만 애써 그 마음 내려놓는다. 저만치라도 고이 자라기 얼마나 어려운지, 올해 양파 농사 완전 망하는 경험 속에, 아니 수년 동안 양파농사 지으면서 톡톡히 배웠으니까.
고작 한 시간 밭일했다고 막걸리 몇 잔 참 잘도 들어간다. 하긴, 이렇게 촉촉한 가을비 만난 날, 밭일 아녀도 술 한잔 그냥 지나칠 수 없었겠지.
비와 어울리는 노래도 막 생각나.
“잊지 못할 빗속의 여인, 노란 레인코트에 검은 눈동자 잊지 못하네~♬”
오랜만에 노동 비슷하게 했으니, 노동요에 걸맞게 노가바(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도 스을쩍~
“보랏빛 레인코트에 그 여인을 잊지 못하네~
내리는 빗방울 바라보며
말없이, 말없이 양파를 심네에~~♬”
일기예보에서는 저녁때쯤이면 비가 그친다고 나왔건만, 늦은 밤 이 시간에도 비가 추적추적 살갑게 내린다.
양파 늦게 심어 조금은 걱정 어린 어설픈 텃밭 농부의 마음을 가을밤 내리는 촉촉한 비가 촉촉하고도 따스하게 어루만져 주는 것만 같다.
‘조금 늦어도 괜찮아, 괜찮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