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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골짜기 혜원 Feb 08. 2019

겨울 산은 살아 있다

언제나 그 자리에 담담하게, 당당하게

겨울 산은 살아 있다.


은빛으로 빛나는 (아마도) 은사시나무, 나지막한 자리에 아담하게 지어 놓은 새 둥지, 치렁치렁 늘어진 칡 꼬투리, 멧돼지가 목욕하고 간 물웅덩이, 고라니 똥과 (또다시 아마도) 살쾡이 똥까지. 추운 겨울 나지막한 산 중턱, 식물도 동물도 저마다 자기만의 모습으로, 발자취로 말을 건넨다. 살아 있음을, 살아가고 있음을. 


아담하게 지어 놓은 새 둥지(왼쪽), 치렁치렁 늘어진 칡 꼬투리(오른쪽).
고라니 똥과 (아마도) 살쾡이 똥을 겨울 산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멧돼지가 목욕하고 난 웅덩이(로 보이는 곳).


멧돼지 만날까 가끔 겁나고, 고라니 만날까 자주 기대되는 겨울 산을 걷는다. 봄이 오고 여름마저 찾아오면 우거진 덤불, 무성한 수풀 사이로 다시 발 딛기 어려울지도 모를 이곳. 손에 착 잡히는 명아주 지팡이 짚고 한 걸음, 두 걸음 내딛는다. 잠시 숨 고르며 바위에 앉는데 자꾸만 입에서 노래가 흐른다.


“햇볕 한 줌 앞에서도 솔직하게 살자, 어둠 속에서도 제대로 살자, 물 한 방울 앞에서도 솔직하게 살자, 진흙 속에서도 제대로 살자~♪”


도종환 시에 윤민석 씨가 곡을 붙인 ‘오늘 하루’라는 노래. 서울에서도 혼자 많이 불렀는데 산골에 오니 왠지 더 사무치게 좋아졌다. 날마다 만나는 햇볕, 물 한 방울과 흙 한 줌, 그리고 돌멩이 하나까지. 그것들 앞에서 솔직하게, 사는 것처럼 살아보자고 마음 꽉 다잡으며 다시 산길을 오른다. 


“상처 없는 느티나무를 보았니~♪”

조금은 쓸쓸하고 헛헛한 자리에 홀로이 서 있는 느티나무를 만났다. 



누가 그랬는지 몰라도 나무를 싹 베어 버려서 둘레가 허전한 자리. 무성한 잎 다 떨구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어도 담담하게, 당당하게 멋스러운 겨울 느티나무를 한참을 서서 바라본다. 노래 하나 다시금 떠오른다. 


“상처 없는 느티나무를 보았니,
 크고 작은 상처들이 오래 남을 무늬들을 새기고~♪”


지난해 12월, 지리산 자락에서 열린 행사에서 처음 만났던 노래 ‘느티나무를 위하여’다. 그때 마음에 깊이깊이 스몄더랬지. 


산골에 살면서 느티나무랑 참 가까이 지낸다. 마을회관 푸근하게 감싸는 느티나무부터 마을 분들이 묘목으로 기르는 것, 그리고 산 곳곳에 따로 또 같이 서 있는 나무까지. ‘느티나무를 위하여’라는 노래를 만난 뒤로는 느티나무든 또 다른 나무를 볼 때면 이 노랫말이 저절로 흘러나오곤 한다. 


“굳은살을 만드는 걸 너는 아니, 그 상처들이 나무 둥치를 키우고, 마침내 동네 하나 덮고도 남을 그늘을 키워내는 걸~♪”


특히나 뒷 소절을 들을 때면 꼭 산골 마을을 위해 만든 노래 같다는, 착각 아닌 착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 마을회관 앞을 든든하게 덮어 주는 느티나무가 자꾸만 생각나선. 언젠가 마을 할머니, 할아버지, 아주머니, 아저씨들까지 모두 모아 놓고 이 노래를 불러 봐도 좋겠다는 마음도 들었지. 다들 ‘느티나무’만큼은 아주 잘 아는 분들이니까, 왠지 이 노래만큼은 뭔가 ‘느껴’ 주실 것만 같기도 해서. 


하얀빛이 신비로운 (아마도) 은사시나무. 참 멋스럽다.


느티나무는, 그리고 다른 많은 나무들은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 철이 어떻게 흘러가든. 사철 내내 생긴 크고 작은 상처들을 굳은살로 만드는 때가 어쩌면, 잎도 열매도 다 떨구어낸 바로 지금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앙상한 겨울나무가 푸른 잎 가득하던 그때보다 왠지 더 아름답고 힘차게 느껴진다. 존경스러운 마음도 마구 일렁이고. 


그런 나무에게 배우고만 싶다. 크고 작은 상처들로 나무 둥치를 키우고, 마침내 동네 하나 덮고도 남을 그늘을 키워 내는, 끈기 있게 굳세고 당당한 나무의 힘을, 그 삶을. 


"오늘 하루를 사무치게 살~자" 노래로 마무리하는 행복한 산골 금요일 밤.


나에게 주어진 오늘 하루를 정성껏 보내고 난 늦은 밤. 겨울 산에서 흐르던 노래들이 자꾸만 입에서 맴도는 바람에 끝내, 밤 열두 시 넘어 기타 잡고 불러 보았네. 다행히 악보가 있는 ‘오늘 하루’부터.  


“창호지 흔드는 바람 앞에서도 돌멩이 하나 앞에서도, 은사지 때리는 눈보라 앞에서도 오늘 하루를 사무치게 살자~♪”


오늘 하루만큼은 나도, 겨울 산도 사무치게 살았을 거라고 믿고 싶다. 홀로 부르는 노래가 있어 더 좋은 산골 금요일 밤. 불타는 네온사인 없어도 좋아, 오늘 같은 밤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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