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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골짜기 혜원 Feb 18. 2019

산골살이 특권 중에 특권, 정월대보름 달집 태우기

‘귀농, 귀촌인들이 많아질 수 있게 하소서!’

내일 비가 많이 온다고, 하루 앞서 정월대보름 잔치를 연다고, 어젯밤 마을 방송이 울렸다는데, 듣지 못한 채 새벽까지 뭔가를 하다가 느지막이 일어나 비몽사몽 하던 순간, 누군가의 전화벨 소리 덕분에 그 사실을 알았다.

 

아흑, 온몸이 땅에 꺼질 듯 무거운데 오늘 하는 줄 알았으면 어제 하던 일 미루고 좀 일찍 잘걸, 하고 후회해 봐야 무슨 소용. 옆지기는 돼지 잡는 아저씨들 곁으로, 나는 음식 준비하는 아줌마들 곁으로 따로 또 같이 정월대보름 마을 잔치 속으로 꾸역꾸역 걸어 들어갔다.   


마을회관에 가니, 벌써 무수한 음식들이 잔뜩 쌓여 있다. 얼마나 일찍 움직였으면 벌써 저렇게 다 해 놓으셨을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전 부치는 옆에서 잔심부름이나 하면서, 마당에 모인 아저씨들한테 술이랑 안주 나르는 정도. 


마을 분들이 차곡차곡 쌓아 만든 달집. 아담한 예술작품처럼 멋지다.


그러는 가운데 마을 엄니들이 자꾸 막걸리를 따라 주신다. 한 일도 없는데 그거라도 잘 받아 마셔야지. 잔 들고 마시려는데 누군가 슬쩍 외친다. “저이는 맥주 좋아해요!” 그 한마디에 술 따라주던 엄니, 밖에 나가 맥주 들고 오신다. 좋아하는 거 줘야 한다면서. 그렇게 낮 열두 시 되기 전부터 하는 일 없이 속만 알딸딸~.


그래도 뭔지 모르게 기분은 좋구먼. 어느덧 마을살이 4년 차에 접어들었고만, 여전히 낯선 분들이 많이 보이는 마을회관. 발 들여놓던 순간 어쩔 수 없이 좀 주눅이 들었는데 술 몇 모금에 기분이 사르르 풀린다. 역시 알코올이, 아니 사람들과 나누는 술이 최고야! 


돼지 잡던 아저씨들 하나둘 모여들면서 드디어 마당에선 돼지 잔치가 열리고. 저 건너 들판에선 달집 만드는 분들 손길도 바쁘기만 하다. 차곡차곡 달집 세워 가는 모습이 뭔가 예술작품을 만드는 느낌이다. 달집 한가운데에 ‘유정마을 소원’이라고 적힌 종이를 찬찬히 들여다본다.


내 마음에도 쏙 드는, 정월대보름맞이 우리 마을 소원!


‘우리 유정마을의 안녕과 화합, 그리고 풍년농사를 기원하며, 올 한 해의 액운을 물리치고 자손의 번창과 행운을 기원합니다. 아울러 귀농, 귀촌, 귀향하려고 하는 분들이, 우리 유정마을로 들어오고 싶어 하는 그러한 마을이 되게 하소서!’ 


마지막 문장을 누가 생각해 냈을까, 괜스레 궁금해지던 유정마을 소원 이야기. 흐뭇한 웃음이 번진다. 


늦은 오후, 정월대보름 잔치를 본격으로 알리는 풍물 소리가 온 마을에 울려 퍼진다. 풍물패가 있는 우리 마을, 멋진 마을! 사람들은 점점 더 많아지고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산골에서 누릴 수 있는 특권 중의 특권, 달집 태우는 시간.  


정월대보름 잔치에 풍물이 빠지면, 앙꼬 없는 찐빵이겠지? 풍물패 있는 우리 마을, 멋진 마을!


‘타닥 타타닥 탁탁!’ 


대나무 타는 소리와 함께 하늘로 치솟는 불길. 막 떨어져 내리던 비님마저 싹 사라지게 만든 그 불기운에 취해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형수님, 그러다 밤에 오줌 싸겠어요.^^”


우리보다 조금 늦게 귀촌한, 옆지기와 ‘형님, 아우’ 하면서 지내는 분이 던지는 농담도 마냥 기분 좋게 들리기만 하던 정월대보름 하루 전날 밤. 불꽃놀이처럼 화려하고 따뜻하게 하늘을 수놓는 빨갛고 노란 불씨들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를 되새겨 본다. 


갑자기 대보름 행사 날 바뀌었다고 부스스한 얼굴로 잠시나마 속 끓였던 시간, 내 마음이 모자랐다. 그럼에도 마을회관으로 애써 걸어간 것, 그 와중에 참 잘했다. 


타올라라, 타올라라. 모든 액운 다 떨쳐내고, 모든 행운 다 들어올 수 있도록 높이 높이~.


그 어느 때보다 마을 분들을 많이 만났던 오늘. 여전히 낯선 얼굴들 천지고, 낯익은 얼굴 앞에서도 어색함을 떨치지 못하기 일쑤지만, 그래도 뭔가 조금은, 아주 조금은 그분들과 교집합이 생긴 기분이 든다.  


밖에서는 돼지를 잡고, 달집을 만들고. 안에서는 음식을 만들고, 밥상을 차리는 마을 분들과 조금 긴 시간 함께하면서 마음 깊이 바라면서도 마음 깊이 힘들 때가 많은 ‘마을 공동체’라는 것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던 오늘 하루. 소중한 명절, 정월대보름을 마을 공동체와 더불어 지켜내며 살아오신 마을 어른들께 참 고마운 밤이다. 


한 해 농사 풍년과 마을 사람들끼리 잘 어울려 살 수 있기를 기원하는 명절, 정월대보름. 농촌이, 시골이 살아 있어야 이 풍속도 계속 이어질 수 있을 테지. 정월대보름 전날 밤, 흐릿하게 뜬 둥근달을 올려다보며 소원 하나 올려 본다. 


장독대 앞에서도 풍물과 축원이 펼쳐진다. 역시, 장독은, 장은 귀한 것이여.
마을 아저씨가 새끼 꼬는 모습이 정말 멋지다. 달집에 소원지 걸 때 쓰이는 건데, 따라 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조금도 따라 할 수가 없었음.


정월대보름이 겉치레를 위한 행사가 아니라 삶이 묻어나고 녹아나는 마을 잔치로 오롯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농촌이 잘되고, 농민이 잘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그리고 ‘유정마을 소원’처럼 땅과 더불어 살아가는 귀농, 귀촌, 귀향인들이 많아지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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