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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골짜기 혜원 May 18. 2019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산골부부 고구마순 심은 이야기

점심 전 고구마순 심을 땐 해가 짱짱했다. 


고구마 심는 법 친절하게 알려주는 옆지기, 아니 우리 집 텃밭지기 님. 해마다 하는 이 일이 때마다 새롭기만 하구나!


한 가닥 두 가닥 흙속에 고이 넣어 준다. 이 푸릇하고 가는 줄기에서 주렁주렁 실한 고구마가 열리다니…. 햇볕이 뜨거워 그랬을까, 왠지 마음이 시큰하다.  


작은 텃밭에서 그래도 큰 자리를 차지하는 고구마 밭. 여섯 골 김매는 데는 일주일쯤 걸린 듯한데(종일 일한 건 아님) 심는 데는 두 시간도 채 안 걸린다. 


올봄 마지막 농사, 고구마를 다 심고 허리는 뻐근해도 마음만은 뿌듯하게 점심밥을 먹고 있는데 어라, 하늘이 갑자기 흐려진다. 밭에 있을 때 해는 뜨거워도 바람이 시원하게 불더니만 설마, 비님이라도 오시려나? 한동안 가물기만 했지 날씨 예보에 분명 비 소식은 없었는데. 비만 와 주신다면, 물 많이 먹는 고구마가 엄청 좋아할 텐데!


고구마 밭 김매는 데는 일주일, 심을 땐 두 시간이면 끝!  
물을 많이 먹기에, 언제나 비를 기다리는 가느다란 고구마순들. 


그 뒤로도 해가 났다, 들어갔다 오락가락한다. 하늘만 살짝 흐려지면, 욕심인 줄 알면서도  바라게 된다. 


‘비야 와라, 비님 부디 와 주세요.’ 


하늘 보며 내내 그러고 있으니, 애틋하고 따뜻하게 봤던 일본 영화 제목 하나가 불쑥 떠오른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만일 예고에 없던 비님이 오시면 애타게 물 기다리는 고구마순한테도, 농사 서툰 산골부부 삶에도 기적이 내리는 기분이 들 것만 같다. 산골부부 고구마순 심은 날,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예보에 없던, 생각지도 않던 고마운 비님이 찾아오시는 기적이! 아, 설레고도 설레는 마음…. 


고구마순 심은 날 갑자기 흐려진 하늘 덕분에 불쑥 떠오른 영화 제목,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오전에 고구마순을 심고 나서 오후 내내 기다리던 비는, 어쩌면 진짜로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두근두근 기대했던 ‘자연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저녁에 마을회관에서 만난 아주머니가 그런다. 


“오늘 찌뿌드드하게 후덥지근하기에 비 올지 모른다고 생각은 했는데 이 저녁 시원해진 걸 보니 비는 가신 것 같네요. 가을에는 찬 기운이 돌면 비가 오는데 봄에는 후덥지근한 게 이어져야 비가 와요. 그러니 기다리지 말고 밭에 물 줘요.”


고구마 심고 한 밤 자고 나니 결국 비님은 고맙게도 와 주셨다!


자연에 기대했던 기적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아주 살짝 아쉽긴 했지만 괜찮다. 고구마순 심고서 딱 한 밤 자고 난 뒤부터 장대비가 시원하게 죽죽 내리고 있으니까.  


넉 달쯤 지나면 저 여린 줄기들 아래서 큼지막한 고구마를 캐게 될 테지. 기적이 뭐, 따로 있나. 하루 이틀 그렇게 자연의 힘으로 고구마가 조금씩 자라는 시간들이, 나에겐 언제나 새롭고 놀라운 기적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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