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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골짜기 혜원 Jun 10. 2019

친정 식구 웃게 하는 열무김치와 왕고들빼기김치

초여름 제철 김치가 전하는 삶의 향기

푸릇한 이파리가 쑥쑥 올라오는 열무를 볼 때마다 다짐 또 다짐했다.


다시는 같은 실수 되풀이하지 않을 거야!   

농작물마다 거두기에 알맞은 때가 있다. 머리로는 안다. 그런데 몸도 마음도 잘 안 따라 준다. 놔두면 왠지 더 자랄 것만 같다. 생짜배기 바보처럼! 열무 앞에서도 그랬다. 40일 기르면 좋다는데, 오월을 넘기면 안 된다는데 조금만 더, 하루만 더…. 그러다 지난해는 심은 지 50일도 넘어서야 꽃대까지 군데군데 솟아오른 열무를 뽑았다. 


푸릇한 이파리가 쑥쑥 올라오는 열무를 볼 때마다 지난해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노라, 다짐 또 다짐했다.

 

질기고 거친 뿌리와 줄기를 다듬으면서 깨달았다. 늦어도 한참 늦었다는 걸. ‘과연 먹을 수 있을까?’ 걱정이 가득이었지만 애써 자란 채소한테 미안해서라도 손을 놓을 수 없었다. 여름에 먹어야 제 맛인 열무김치. 결국 제때 맛도 못 보고 지난겨울 볶음김치로 꾸역꾸역 해치웠다. 푹 익어도 여전히 껄끄러워서 오래오래 지져야만 했던 2018년 열무김치. 마지막으로 비워내던 날, 굳게 마음 다졌다.  


올해는 꼭 열무 일찍 거둘 테다!

열무가 자라는 동안 텃밭에 저 알아서 자란 쇠똥(왕고들빼기)부터 뽑았다. 이때가 김치로 먹기에 딱 좋다. 다듬고 씻고, 절이고 버무리고. 옆지기랑 힘 모아 한나절을 보내니 쇠똥김치 드디어 마무리! 초여름 기운 없을 때 입맛 확 살리는 이 반찬을 우리 부부만 먹기엔 좀 아쉽다. 


‘맞다, 둘째 형부!’ 


얼마 전 언니랑 같이 왔을 때 맛보기로 쪼끔 만든 쇠똥김치에 쉼 없이 젓가락질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이런 건 생각났을 때 바로 움직여야 한다. 택배 싸기 시작!  


텃밭에 저 알아서 자란 쇠똥(왕고들빼기). 이때가 김치로 먹기에 딱 좋다.
다듬고 씻고, 절이고 버무리고. 김치 만들기는 양이 적든 많든 시간이 한참 걸린다.


택배 잘 받았어. 얼마나 꼼꼼히 잘 쌌는지 단 한 방울도 새지 않고 잘 왔어. 고들빼기김치 냄새도 엄청 좋고 먹어 보니 참 맛있네. 밥에 물 말아 이것만 먹어도 한 그릇 뚝딱이야. 양념에 밥 비벼 먹어도 그만이고. 맛있게 잘 먹을게! 


택배 보낸 다음 날, 둘째 언니한테 바로 연락이 온다. 고들빼기김치 찬물에 말아 먹으면 집 나간 입맛도 돌아온다는 건 또 어찌 알았는지, 흐뭇흐뭇.   


집에 와 보니 고들빼기김치가…. 채취하고 다듬고 양념하고 보내는 과정에서 두 사람이 어떤 표정으로 그 시간을 함께했을지 알기에 정말 고맙고 마음이 부자가 된 듯해요. 하나하나 마음과 정성이 가득 담겨 있다는 걸 느끼네요. 덕분에 입맛 없는 요즘에 밥맛 날 것 같아요. 늘 마음 한 켠 잊고 지내는 여유로움과 또 다른 삶의 향기를 띄워 줘서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날마다 야근이라고 언니가 걱정이 많더니만, 밤 열한 시 넘어 감수성 철철 넘치는 형부의 메시지가 날아온다. 냉큼 답장을 보낸다.  


“누군가 기쁘게 받을 때 보내는 마음이 참 행복하다는 거, 형부가 더 잘 아시죠? 지금 제 마음이 딱 그래요.”


커피부터 온갖 생필품까지, 말도 없이 택배로 툭툭 안겨 주는 형부한테 이렇게라도 고마운 마음을 전할 수 있어 참 뿌듯하다. 열무김치도 얼른 하고만 싶네. 이걸로 힘주고 싶은 사람이 곧바로 생각나는 바람에.  


그래, 바로 오늘이야!  

열무 씨 뿌리고 서른아홉 밤이 지난 어느 아침, 드디어 밭으로 나섰다. 김장이라도 앞둔 사람처럼 설레고도 긴장된다. 밭 한 자리 흐드러지게 채우던 열무를 거두니 꽤 푸짐하다. 다듬고 절이고 버무리느라 종일 허리가 아팠지만 맛있게 먹을 누군가를 떠올리면서 힘들어도 곱게 참아낼 수 있었다.   


밭 한 자리 흐드러지게 채우던 열무를 뿌듯하게 거두었다.
다듬고 절이고 버무리느라 종일 허리가 아팠지만 맛있게 먹을 누군가를 떠올리면서 힘들어도 곱게 참아낼 수 있었다.


“열무김치 잎이 야들해. 간은 또 어쩜 싱겁지도 짜지도 않게 딱 맛날 정도로 돼서 엄청 맛있네. 애랑 형부 모두 맛있다면서 먹었어. 고들빼기김치도 엄마가 담근 것보다 더 맛난 거 같음이야. 나이가 드니 그런가, 요즘 엄마 생각이 자주 나네.”       


산골 김치 택배를 받은 큰언니 수다가 이어진다. 어디 그뿐인가. 갓난아이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훌쩍 커버린, 대학 졸업하고도 시험 준비에 바쁜 내 사랑 큰 조카가 전화를 다 했지 뭔가. 


“이모, 김치 진짜 잘 먹을게요. 편지도 고맙습니다!” 


이렇게 전화 너머 목소리를 들은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후훗, 힘내서 공부하라고 예쁜 엽서도 같이 넣길 잘했지. 지난해 봤던 시험에 미끄러지는 바람에 살도 쏙 빠지고 마음고생 많아서 무지 안쓰러웠는데…. 생기 넘치는 목소리를 들으니 내 마음도 두둥실 뜨는구나.  


초여름 기운 없을 때 입맛 살리고 살아갈 힘까지 안겨 주는 쇠똥김치(위)랑 열무김치(아래)가 참 고맙다.


초여름 기운 없을 때 입맛 살리고 살아갈 힘까지 안겨 주는 제철 김치들. 친정 식구들한테 행복까지 가득 실어 주니 그저 고맙기만 하다.  


“우리는 모두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음식을 최초의 맛으로 기억한다. (…) 맛은 추억이다. 맛을 느끼는 것은 혀끝이 아니라 가슴이다.” 


김치 할 때면 만화 <식객>에서 본 저 이야기가 자주 생각나곤 했다. 그리고 또, 일찌감치 하늘로 가신 엄마도. 왠지 어릴 때 먹던 고들빼기랑 열무김치 덕분에 이번 김치들도 그럭저럭 해낸 것만 같다. 가슴에 새겨진 엄마 손맛이 산골살이를 지탱해 주고 있으니 다음 제철 김치 주인공인 부추, 오이, 고구마순도 맛깔나게 버무릴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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