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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쿼카킴 Jan 12. 2019

카페인 1. 어느 날, 내 몸이 카페인을 거부했다


 불행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아니, 어쩌면 끊임없이 보내던 예고들을 내가 눈치채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불행의 정체를 정확하게 깨달은 것은 한 해를 보내고 새해가 시작되던 때였다. 차가운 바람이 부는 한 해의 마지막 날, 다정한 친구 S와 중앙동 골목 구석에 위치한 카페를 찾았다. 베토벤의 흉상과 피아노가 있는 오렌지 톤의 오래된 카페에서는 LP판을 통해 퀸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메뉴판을 한참동안 뒤적였지만 역시 선택은 커피였다. 향이 좋은 드립 커피가 나오는 동안 우리는 마주 보고 앉아서 가족에 대해, 미래에 대해, 언젠가는 함께 떠날 여행에 대해 이야기했다. 정말 평온하고 인상적인 순간으로만 기억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게 오늘의 세 번째 커피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사실은 점심 때 일찍이 만나 밥 먹고 1차 카페 방문이 있었다. S가 가고 싶다 점 찍어둔 적산가옥을 개조해서 만든 카페였다. 중앙동은 발전이 더디다 못해 없는 수준에 가까웠지만 덕분에 독특한 분위기의 건물과 명소가 종종 있었다. 그런 공간 중 하나였던 2층의 카페는 커피가 유독 진해서 쓴맛이 오래 남았다. 다음으로 책방 구경을 가려고 했는데 우리의 사전 조사에 오류가 있었는지 그곳은 그냥 책방이 아니라 북카페였다. 이미 들어가서 환영을 받아버렸으니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얼결에 앉아서 또 커피를 주문하는 수밖에. 한참을 얘기하다 보니 저녁때라 간단한 식사를 하고, 이후에는 이야기를 더 나누고자 마지막 카페를 찾았다.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헤어질 때까지만 해도 따뜻한 커피 마시고 좋은 얘기 많이 하며 한 해를 잘 마무리 했다는 행복으로 충만했지만, 집에 와서 눕자마자 후회가 밀려들었다. 시계는 이미 날을 지나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정신이 말똥말똥하여 도저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일은 또 내일의 일정이 있으니까 어떻게든 잠들어 보겠다고 명상음악도 틀어보고, 태양계를 벗어나기 전에 무조건 잠든다는 지루한 우주 다큐멘터리 영상도 틀어놨는데 효과가 없었다. 마지막엔 모든 걸 끄고 침묵과 어둠 속에 눈을 감고 누워만 있었는데, 그 상태, 그 자세 그대로 새해의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고야 말았다. 카페인의 강력한 각성 효과에 대하여 얼마나 안일하게 생각해왔는지 깊은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역시 커피를 세 잔이나 마셨고 저녁에도 커피를 마셔서 잠을 못 잤던 걸까?’

 나의 생각은 보기 좋게 부서졌다. 그날 이후로 저녁 때 커피를 마시지 않더라도, 하루에 세 잔씩 커피를 마시지 않아도 일단 카페인이 들어만 가면 잠을 잘 잘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안락한 잠자리를 위해서는 아예 커피를 안 마시는 게 최고의 방법이란 걸 곧 깨닫게 되었다. 커피를 다른 어떤 음료보다 아끼고 사랑하는 나에게 끔찍한 불행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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