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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대한필맨 Apr 22. 2020

세 번의 행운으로 FC서울 선수가 되다

축구화를 신은 지 18년이 흘렀다.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이다. 운이 좋게도 현재 전문가 반열에 올라가 '프로'라는 타이틀 가지고 필드를 누비고 있다. 나는 왜 운이 좋다고 표현을 했을까. 그 이유는 실력만으로 이 자리에 올라온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나에게 세 번의 행운이 찾아왔다.  번째는 서울 동북고등학교 진학이다. 나는 중학교 때 축구를 시작했다. 또래보다 다소 늦게 시작한 편이었다. 그렇다고 재능이 뛰어나지도 않았다. 2002년 월드컵의 경험은 축구에 대한 열망이 타오르면서 늦은 시작과 재능론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나의 열정에 반대하셨다.


부모님의 반대를 설득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진심을 담은 편지였다. 그 편지의 내용에는 어떻게든 축구로 대학에 진학해서 체육선생님이 되겠다는 의지가 적혀있었다. 즉 나도 내 수준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애초에 프로축구선수가 될 거라 기대도 안했다. 그랬던 내가 놀랍게도 축구 명문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돌이켜보면 이 또한 엄청난 행운이 작용했다.


3학년 동계훈련 때 동북중학교와의 연습경기가 시작이었다. 그 경기에서 두 골을 넣어서 팀의 승리에 일조했다. 전남 강진중학교 시골 촌뜨기 팀이 서울 동북중학교 엘리트 선수 팀을 잡았다는 것은 이슈가 될 만했다. 당시 동북중학교는 명성은 대단했다. 그 경기에서 나를 눈여겨본 동북중학교 감독님께서 당시 동북고등학교 최태길 감독님께 나를 소개해주셨다. 그게 발단이 되어 최태길 감독님께서 내가 출전한 첫 전국대회 경기를 보러 오셨다. 그 경기에서 득점을 성공시켰고, 감독님의 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전국에만 중학교 팀이 200개가 넘는다. 각 팀의 3학년을 10명씩으로만 계산해도 2000명이 된다. 그중 최태길 감독님의 유형의 선수가 감독님 눈에 들어가기란 하늘의 별따기란 말이다. 최태길 감독님께서는 파워풀하고 선 굵은 축구를 선호하셨다. 내가 딱 그런 유형의 선수였다. 그리고 나를 평가한 경기는 단 한 경기였다. 연습경기를 자주 한 경우도 아니었다. 정말 하늘의 별을 딴 격으로 서울 동북고등학교 진학에 성공한 것이다.




 번째는 FC서울 유스팀 전환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으로 올라갈 시기에 동북고등학교는 FC서울 U-18세 팀으로 전환하게 된다. FC서울이 우리 학교를 선택한 이유는 전통이 있는 명문 팀이고, FC서울에서 뛰고 있는 선수 중에 동북고등학교 출신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전남 강진중학교 시골 촌뜨기 선수가 FC서울 유소년 팀 선수로 승격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꿈에도 생각지 못한 행운이 내 품으로 들어온 것이다. 대학 진출을 목표를 두고 시작한 선수가 프로에서 관리하는 팀에서 뛰게 된 것이다.


동시에 대학을 목표로 둔 선수가 목표를 전환하는 계기가 된다. 프로선수들과 클럽하우스를 함께 사용하면서 자주 마주치고 운동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당시 FC서울에는 박주영, 이청용, 기성용 선수 등 국가대표 선수들이 즐비했다. 3학년이 되었을 때는 2군 선수들과 함께 운동하면서 함께 합숙생활을 했다. 자연스럽게 프로의 세계와 가까워지면서 나의 목표가 커지게 되었다.




세 번째는 FC서울 우선지명이다. 내가 대학을 진학할 당시에는 프로팀에서 유소년 선수 중 최대 5명만 우선지명을 할 수 있었다. 우선지명이란 유소년 선수가 대학을 졸업하고 원 소속팀에게 선발권을 주는 제도다.(현재는 모든 선수에게 적용) 당시 동기 중에는 나를 포함 두 명만 우선지명을 받게 되었다. 이 또한 엄청난 운이었다.


지명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당장의 실력보다 대학 졸업 후 성장한 모습을 기대로 가능했다. 당시 FC서울 유소년 팀으로 전환된지는 2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 말은 즉슨 팀에서도 유소년 팀 선수들을 어떻게 운영하고 관리해야 하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물론 R리그에 출전해서 골도 넣고 준수한 활약을 했던 모습에 기대를 걸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노력하는 태도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을 수도 있다.


나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최태길 감독님께서 뽑은 선수였다. FC서울이 주도하에 뽑은 선수는 나의 2년 후배들부터였다. 그중 손흥민 선수도 있다. 대부분 연령별 대표팀 출신의 선수가 많았다. 나는 상대적으로 경쟁에 수월한 동기들 사이에서 평가를 받게 되면서 우선지명을 받을 수 있었다.




위의 세 가지 이유는 프로 선수가 될 수 있었던 대표적인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순간이었다. 역학에서는 숙명과 운명의 차이점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한다. 숙명은 바꿀 수 없는 전제 조건이다. 가족, 국가, 살아가는 시대, 태어난 도시 등 절대 바꿀 수 없는 것들을 말한다.


반대로 운명은 바꿀 수 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더라도 자수성가로 부자가 될 수 있고, 난독증을 갖고 있더라고 작가가 될 수도 있다. 나는 대학을 목표로 축구를 시작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목표는 커져갔다. 어느샌가 프로 선수를 목표로 필드를 뛰어다니게 된다. 그리고 나의 운명은 32살에도 현역을 뛰고 있는 현실로 나타났다.


위대한 대통령 링컨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그는 자신의 현재를 벗어나기 위해서 공부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환경은 도와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독서란 사치일 뿐이라며 노동을 하라고 비난했고, 책 한 권 살 돈이 없어서 몇십 킬로미터를 걸어가서 빌려서 책을 읽었다. 최악의 조건에 놓여있었음에도 대통령의 자리까지 올라가 자수성가가 무엇인지 보여 준 링컨의 모습을 보면 운명은 바꿀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외부의 부정적 신호를 차단하고 스스로 긍정적 신호를 꾸준하게 주입하는 것이다.


링컨 또한 대통령이 되기까지 수많은 위기에 놓였다.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에 노출된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과거 쌓아둔 긍정적 신호. 즉 야망을 이룬다는 생각으로 극복해냈다.




나는 운이 작용하기 전에 운명을 바꾸겠다는 의지와 노력을 했다. 중학교 2학년 때 동북고등학교에 대해서 친구들에게 전해 들었다. 친구들은 최고의 선수들이 모인 학교라면서 추켜세웠다. 당시 말은 못 했지만 속으로 '동북고등학교에 가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1년 후 영화 같은 일이 내 삶에 이뤄졌다. 동북고등학교 진학에 성공한 것이다. 잘한다는 소리보다 못한다는 소리를 더 들었던 내가 목표를 이루게 된 것이다. 당시 아버지께서 너무 못한다면서 축구를 관두라고 했던 기억도 있다. 나는 축구 자체를 즐겼다. 누가 뭐라든 축구만 생각했다. 오로지 축구만 할 수 있으면 행복했다. 그렇게 노력은 나의 운명을 바꾸는 단초가 되었다.


숙명은 바꿀 수가 없다. 그러나 운명은 바꿀 수가 있다. 코로나 사태가 벌어진 것은 숙명이다. 이에 대한 태도에 따라 운명은 변화된다. 특히 위기 상황에 변화는 더욱 극적이게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운은 운일뿐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운을 바라면서 노력한다면 허공에서 물장구치는 것과 같다. 운은 단지 운일뿐이다. 노력을 전제로 운을 받아들일 실력을 쌓아야 한다. 참고로 노력하는 모습 또한 실력으로 평가받는다. 나는 운이 좋았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노력이 없었다면 운을 잡지 못했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다. 앞으로도 나는 꾸준히 노력할 것이다. 운은 언제 어떻게 올지 모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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