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전(5월 30일 토)에 동료들과 스타벅스에 갔습니다. 경기 당일 날에는 방만 있는 것보다 리프레쉬(기분전환)을 위해서 카페에서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게 컨디션 관리에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의 루틴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함께 간 동료들은 룸메이트 허준호 선수를 비롯해서 네덜란드산 용병 제리와 이준기 선수였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루틴'이 대화의 주제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제리는 지난 경기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였는데, 스스로도 그 사실을 자각해서 새로운 루틴을 만들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루틴을 만들고 있어?"
제리가 답했습니다.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모습을 기준으로 루틴을 만드는 중이야."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제리의 의견에 동의하시나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제리와 같은 기준으로 루틴을 설계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다른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최고의 모습이 아니라, 제리 너의 퍼포먼스 마지노선을 높이는 데 루틴을 세우는 게 더 도움이 될거야."
제가 제리에게 최고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지 말라고 조언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최고의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운의 영역에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복잡계입니다. 수 많은 변수가 맞물려있기 때문에 당장 5분 뒤에 무슨일이 일어날지 예측하지 못합니다. 코로나 19로 인해서 온 세계가 몸살을 앓을지는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듯이 말입니다.
축구도 수 많은 변수를 가지고 있는 스포츠입니다. 날씨, 심판의 성향, 지도자의 판단, 팀의 전술, 전략, 상대팀 컨디션 등 다양한 옵션들이 맞물려서 퍼포먼스가 나옵니다. 준비가 잘 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퍼포먼스가 떨어질 수도 있고, 준비를 전혀하지 않은 상태에도 퍼포먼스가 뛰어날 수 있습니다.
즉 최고의 모습을 기준으로 루틴을 세운다는 것은 모든 변수를 포용하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심판의 성향, 그라운드 컨디션, 동료 선수들의 컨디션, 상대팀 전략과 전술을 자신의 입맛대로 관리할 수 있겠습니까.
평균회귀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평균회귀란 자신의 실력보다 높은 퍼포먼스를 보이거나 낮은 퍼포먼스를 보이더라도 결국 자신이 갖춘 실력의 퍼포먼스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2년차 징크스를 들어보셨을겁니다. 데뷔시즌에 기대감을 품을 수 있는 퍼포먼스를 보여줬는데, 2년 차에는 기대에 못미치는 경우를 말합니다. 예전에는 높은 기대감을 채우기위한 압박감을 이기지 못해서 퍼포먼스가 떨어졌다고 해석했었습니다. 최근에는 압박감보다 본인의 실력으로 돌아왔다고 해석하는데 무게를 더 두고 있습니다.
스포츠 중에서 테니스, 골프는 선수의 기량이 승패를 좌지우지 하기 때문에 평균 회귀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축구, 야구, 농구 같은 경우에는 운과 기량이 결부된 스포츠이기 때문에 평균 회기 현상이 많이 나타납니다.
우승 후보의 팀이 시즌 초반 허우적 대더라도 시즌이 거듭될 수록 자신의 순위를 찾아가는 것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축구는 운과 기량이 결부된 스포츠라는 알았다면, 최고의 모습이 자신의 실력만으로 보여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최악의 모습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습니다. 선수들의 급격한 폼 저하는 준비과정에서 소홀한 경우가 태반입니다. 소홀하게 된 이유는 경기 중 받은 정신적 충격에서 시작될 수도 있고, 일상에서 이뤄지는 인간관계에서 비롯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경기에서 퇴장을 당했거나, 연인과 헤어지는 경우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부정적 자극들은 감정을 격하게 만들어냅니다. 뇌는 격해진 감정을 안정적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에너지를 소모합니다. 심리적 안정화 작업을 위해 사용된 에너지는 다음 경기를 준비하기 위한 절제력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외부 자극들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면서 온갖 유혹에 쉽게 굴복하게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퍼포먼스를 위한 준비 작업은 소홀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퍼포먼스의 기복이 심해지게 됩니다. 경기 중에도 집중력이 떨어지게 되면서 최악의 플레이를 보이게 됩니다.
루틴은 이런 상황을 대비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합니다. 축구선수도 인간이다보니 감정적으로 동요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만약 당신의 목표가 더 높은 곳에 있다면 자신의 행동에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힘든 그 순간들을 성장의 과정으로 인식하고 겸허히 수용해야합니다. 분명히 수용하는 과정은 고된 순간이 될 겁니다. 그러나 그 순간을 넘기게 되면 퍼포먼스의 마지노선을 높이게 되면서 자신이 가진 퍼포먼스의 스펙트럼을 좁힐 수 있게 됩니다.
제리는 저의 인사이트에 공감을 했습니다. 먼 타국에 와서 말도 잘 통하지 않는 환경에서 자신의 가치를 매경기 증명해야 하는 용병의 신분으로써 느껴지는 압박감은 어마무시할 것입니다. 그 와중에 지난 경기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였으니 조급한 마음도 일렀을 겁니다.
다행히도 제리는 자신의 부진을 수용했고,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굉장히 고무적인 태도입니다. 많은 선수들은 자신의 부진한 퍼포먼스를 수용하기보다 부정하거나 회피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그쪽이 훨씬 더 심리적으로 안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장하기 어렵습니다. 축구선수는 은퇴하기 전까지 성장을 목적으로 준비하고 훈련하고 경기를 뛰어야 합니다. 축구는 상대를 이기는 스포츠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4시간 후면 리그 3라운드가 시작됩니다. 일주일 동안 퍼포먼스의 마지노선을 높이기 위해 준비했던 저의 노력을 제 자신은 알고 있습니다. 이는 저에게 자신감으로 발현되어 경기에 집중할 수 있는 상태. 즉 몰입상태를 경험하게 해줄거라 확신합니다.
저는 프로축구선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기기 위해 준비하고 그라운드를 누빕니다. 오늘도 휘슬이 울리는 그 순간까지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