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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Sep 15. 2017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1669, Oil on canvas, 262 x 206 cm, The H


성경 어디에도 없지만 그가 아버지께 돌아갈 마음을 품은 것은 이른 봄이었을 거예요.

그는 들에서 돼지를 치고 있었죠.

북풍한설이 물러가고 따스한 햇살이 사위에 드리운 날이었어요.

어린 풀들은 자그마하게 솟아나 있었고어디선가 불어오는 부드러운 바람은 나무에서 돋아나는 새순을 만지듯그를 어루만졌어요.

아련한 아지랑이는 그의 외로움을 지나 기억의 창을 열었을 거예요.

차마 사람이라는 체면 때문에 꼭꼭 닫아걸고 열지 못했던 창문 말이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그에게 부끄러우면서도 선명한 희망을 주었어요.  

아ㅡ, 나를 정말로 사랑하시던 아버지!

그는 분연히 일어났어요.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눅 15:19-20)


 렘브란트는 평생 성경을 깊이 묵상하면서 그림을 그린 사람이죠. 

<돌아온 탕자>도 여러 버전으로 많이 그렸다고 해요.

젊은 시절에는 탕자에 초점을 맞추었지만나이 들어갈수록

그는 탕자를 받아들이는 아버지에게 포커스를 향했다고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포옹을 하고 있네요.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세 사람의 응시 좀 보세요.

저 맨 뒤의 흐릿한 사람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네요.

아마도 직속상관인 큰아들에게 구박을 당하던 시종일지도 모르겠어요.

돌아온 둘째 아들을 환대하는 아버지를 보며 

이야 재미있군, 과연 다음 장면은 뭘까...흥미진진해 보이는 구경꾼이네요.

예수님 주변에 많았던,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많은 구경꾼,

혹.우리의 모습 아닐까요? 

모자를 쓴 사람은 아주 진지하게 이 장면을 바라보고 있네요.

아마도 그 집의 모든 일을 관리하는 집사장 같아 보여요.

그는 아버지와 아들을 바라보고 있지만

실제는 그 장면이 가져올 자신에 대한 영향을 생각하고 있는 듯해요.

수많은 권력가나 제사장들이예수님을 보는 대신 자신에게 다가올 파급효과만을 생각했듯이 말이죠.

역시 우리의 생각인가요.

서있는 사람은 큰아들입니다.

아니 도대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작금의 상황은 뭐지?

아버지! 한 번도 나를 그렇게 안아주신 적 없으셨잖아요.

나는 날마다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 말씀에 순종하고 살았는데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질투와 욕망에 젖어있는 눈빛을 좀 보세요.

우리가 거울에서 자주 대하는 눈빛이네요.

거지가 되어서 돌아온 아들은차마 아버지를 바라보지도 못한 채 아버지의 품에서 울고 있습니다.

헤진 발과 벗겨진 낡은 신발 짝은 아버지의 품을 떠난 자의 삶을

어떤 설교보다 더 웅혼한 목소리로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네요. 

아버지의 손길이 이렇게 따뜻하다니,아버지가 나를, 이 죄 많은 나를 이렇게 아직도 사랑하고 계시다니...

슬픔과 회한에 가득차서 차마 얼굴을 들 수 없었겠지요.

아버지는 어떤가요.

환한 빛 가운데서 아들을 품고 있는 아버지요.

아 눈을 감고 있네요.

너의 두려움도 너의 더러움도 너의 죄악도 너의 불순종도..다 보지 않겠다.

오직 돌아온 너만 내 아들인 너만 보겠다는 선언을 저렇게 감은 눈으로 하는 거겠지요.

손의 크기가 선명히 다릅니다.

아들의 어깨를 품은 두 손은 자식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끝까지 기다리겠다는,

결연한 사랑을 보여주네요.   


지난번 글에서 썼듯이 이번 러시아 여행에서 가장 큰 기대를 한곳은

생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에미르타지 박물관이었어요.  

루브르와 대영박물관에 이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박물관,

프랑스나 영국처럼 도둑질(?) 하지 않고 컬렉션한 작품이라는 자부심이 강한 박물관 .

방이 1056 개에 지붕 위 조각만 해도 170 여개작품 하나에 일분씩 할애한다 해도 팔년이 걸린다 하니

무슨 감상을 할 수 있겠어요. 

그저  램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와 마티아스 스토머의 ‘야곱과에서 ’ 

두 작품만 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지요.

설마 눈을 밝히 뜨고 다니면 보이지 않을까 했는데 오산이었어요.  

에미르타주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돌아온 탕자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라도 알현 할 수 있었는데

야곱과 에서는 보이지 않더군요.

스쳐지나온 수많은 방들 중에 있었겠지요.

<돌아온 탕자>는 정말 눈부신 작품이었어요.  

아름답고 고귀한 사랑을 풍성히 나타내면서 자비로운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었어요.  

그 작품 앞에 내가 서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전율까지는 아니더라도 경이롭더군요.

가만히 속삭였어요. 

당신의 실체를 이렇게 제 눈으로 볼 수 있다니.....참, 행복합니다.   (교계신문 연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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