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 캔버스에 유채 모란디미술관 소장
베토벤의 음악이 원하는 음들을 끝까지 밀고 나가서 터뜨리며 자신의 승리를 알리는 웅변이라면
브람스는 갔다가 되돌아서며 자신만의 비밀을 살짝 내비치는 독백,
그래서 더욱 심오하고 철학적인 음악이 된다고 평자들은 이야기 합니다.
조르지오 모란디는 당연히 베토벤 보다는 브람스 쪽이겠습니다.
그는 이탈리아 사람인데 볼로냐에서 태어나 볼로냐에서 사망하는 동안
자신이 사는 곳을 거의 떠나지 않고 작은 골방에서 평생을 작품에 몰두 했다고 해요.
그는 실제 붓을 들고 있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지금은 작업중! 이라고 했다는군요.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거라고,
모란디의 다큐를 찍은 감독은 해석하더군요.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거나 거의 아무것도 없다 .
중요한 것은 예술가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위치에서 자신의 관심을 끄는 대상의 본성을 찾는 것이다 >
모란디의 말인데요.
수 년 전 모란디의 정물화를 친견할 때.
그의 작품을 보며 문득 그가 공기 ...를 그리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들었어요.
어디에나 가득 차 있는 공기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를 그려냄으로 ‘존재’에 대한 ‘형상’을 나타내는,
실체가 공기를 살짝 함몰시켜,
공기를 보여주는,
정말 그의 그림에서 공기가 우묵하게 눌러져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작품도 보았어요.
조금 어둡지만 그림자처럼 흐릿하게 사물의 뒤로 밀려나 있는 공기층,
세상에서 가장 큰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그 촘촘한 막과의 경계선을,
아무도 보지 못하는 것을 그는 바라보았을지도 모릅니다.
모란디는 공기와 피사체 그들의 부딪힘을 최소화하기 위한 완충제로
켜켜이 쌓이는 먼지를 사랑스럽게 여겼을 수도 있어요.
전시장에서 실제 모란디가 사용한 그만의 오브제도 전시되어 있었어요.
지극히 낡고 평범한 죽어있는 정물이었지요.
그는 꽃도 생화가 아닌 조화를 사용했다고 해요.
정물에게 자기만의 색깔을 칠하고 먼지가 켜켜이 앉도록 두었다는데 끊임없이 바라보았겠지요.
시간의 더께와 궤를 같이하는 먼지는
그가 유일하게 흥미를 느끼는 공간, 빛, 색, 형태에 어떤 작용을 했을까요?
먼지 쌓인 (혹은 시간이 쌓인)물체가
아주 간결한 구도와 단순한 색채만으로 변화되어
얼마나 고요한지
얼마나 적막한지
그리고 얼마나 깊은 울림을 주는지,
단순한 피사체를 더욱 단순하게 만드는 색의 조화로움은 또 얼마나 소박한지,
부드럽고 세련된 그러나 매우 감각적인 색상과 자리배치로 인한
모란디의 새로운 공간을 건축이라고 표현한 사람도 있습니다.
푸른 손잡이가 있는 설탕기와 단순한 병들의 윤곽선은 배경인 듯 그림자인 듯 명쾌하지 않아
서로에게 더욱 각별합니다.
예술의 커다란 힘들 중 하나는 망각으로
세상사에서 벗어나 다른 세상으로 진입하게 합니다.
처해있는 세상을 객관화 시키는 위대한 힘이기도 하죠. .
모란디는 시대를 따라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한때 침체된 이탈리아의 문화를 개혁하고자하는 뜻에서 파시스트당에 합류하기도 했지만
정치에 이용당하는 미술계를 떠나
새로운 화파가 연이어 등장하던 모더니즘의 물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를 굳건하게 지켜 나갔습니다.
그래서 현대에 이르러서도
화가들의 화가가 되어
그의 작품은 작가들에게 조차 깊은 영감의 원천이 되어있습니다.
인디언 아라파호족은 11월을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 하더군요.
역으로 11월은 사라진 것이 많은 달이라는 이야기도 됩니다.
나뭇잎 우수수 지고 나무의 골격이 드러나듯
가버린 세월의 자취가 엿보이는 시간, 다가오는 시간이 넌지시 보이는 즈음입니다.
세상이 너무도 소란하여 모란디의 고요하다 못해 적막한 작품을 보며
“소박한 풍경이 가장 아름답다”라는 그의 말을 깊이 생각해 봅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교계신문 연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