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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Sep 21. 2017

스스로 추방당한 자들을 위한 풍경

승효상 강연

제주도의 묘들은 참 아름다워요. 

그중에서도 마라도의 묘들...은 생과 사의 경계가 없는 것처럼 보였어요.  

이웃집 마실 나가서 거기 자리 잡은 것처럼 아주 편안하게 살고(?) 있어요.  

제주도의  밭 가운데 있는 묘들도 

아이들 땅 따먹기 놀이에서 손가락 뼘 길다랗게 늘여서 

겨우 따먹은 자그마한 땅처럼... 딱 그마마하게 차고앉아서

살아있는 자들을 바라보고 있잖아요. 

마니산 첨성대를  뒷마을에서 오르는 호젓한 길이 잇는데

그 자그마한 산길에 무덤 두 기가 나란히 있어요. 

가을이면 가을대로 봄이면 봄대로 얼마나 호젓해 보이는지....

봄 가을 교회에서 함께 가던 등산길에서 꼭 드려다 보곤 하지요.

얼마 전  경주에서 바라본 능들이 정말 아름답더군요. 

너무도  부드러워 보여서  그 부드러움이 커다랗거나 거대함을 오히려 잊게 하더라구요.  

부드럽고 어여쁜 능,

여행을 가면 언제나 스쳐 지나가곤 하는 그 나라 특유의 묘나 공동묘지들을 

바라보고 싶은 욕구가 많이 생겨요. 

어쩌면 살고 있는 그 어떤 아름다운 건물이나 싱싱한 자연보다  

더 사람을 많이 알고 생각하게 하는 힘이 있는 곳이 무덤 아닐까,  

지난 주일 오후에 

두 주 전에 신청해놓은 승효상 건축가의 강연을 파주 출판도시로 들으러 갔어요.

유명인사라 그분은 저를 모르지만 저는 그분을 아주 잘 알아요.

조카아이 결혼식에 기도도 해주셨는데

마이크가 안 나오는데 그것도 모른 채 작은 소리로 기도를 하셔서 

가까이 가서 마이크를 켜 드렸거든요. 

그분의 책을 두 권이나 읽었으니  아는 거죠. ㅎ    

좀 피곤한 듯 해서.....망서리다가. 

에이 그래도 가자,  나섰는데

세상에 그날 가시거리가 얼마나 좋든지 

북한 땅...천마산이라고 하던가....아주 날선 바위들이 햇살에 분분히 빛나는 모습이 

선명히 보이는 날이었어요. 하늘은 푸르르고... 

그대로 계속 달리고 싶은 날이었죠.  

<스스로 추방당한 자들을 위한 풍경>

강연의 제목이 좀 어려운 듯 해요. 

스스로 추방당한다는 거죠. 

어느 경계선 밖으로 나가는 것요. 

예수도 그렇고 석가도 그렇고...  

이즈음엔 조금 어려운 아무나 하기 쉽지 않는 이런 어려운 명제 앞에 서면

그 문장을...그 행위를 쉽게 풀거나 해석하고 싶지가 않아요. 

그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스스로 추방당하는 자.....는

자기를 벗어나 타인에게로 향하는 것.....으로 해석은 되는데 

이 해석이 정말 그 무거운 무게를 다 감당하고 있는가,... 는 아니라는 거죠. 

과정을 생략한 결론은 아무리 명료한들 결론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주제를 이해하고 요약을 해서 쉽게 이야기 한다는 것은

그리 안할 수는 없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꼭 안고 있어야 되는것요.

가끔 책을 읽으면서

그 순간이 너무 충일하며 좋을 때가 있어요. 

음악회에 가서도 그래요.

정신없이 그 아름다움에 빠져 들다가도 

이게 전쟁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거지?  이 아름다운 노래와 죽음과는?   

이게 뭔가? 이게 나의 삶속에서 무슨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게지?

도무지 의미와 가치는 어디 있는 거지? 

무엇이 의미이고 무엇이 가치인가....

이런 냉소에 빠지기도 한다는 거죠

승선생이 정리를 해주더군요. 

위대한 삶의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의  한마디로 말이죠.

<모든 것은 사라지나 사유만이 전해진다. >

얼마나 아름답고 단정하며 매혹적인 문장인가요. 

사유!!

그는 프로방스의 빛을 사랑하서

네 평반 짜리 집을 짓고 그곳에서 살았다고 해요. 

네 평 반....

승선생이 노무현대통령의 묘지를 설계했다고 하더군요.

설계도를 보여주며

무덤은...죽은 자를 기념하는 장소이지만 실제로는 산자들을 위한 장소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분이 좋아하시는 민주적 방식으로 무덤 앞에 월대를 의식한 

광장을 만들었고 바닥 돌들에 노대통령을 기리는 사람들의 글을  새겼다구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에 가면 저절로 서성이게 된다는 거예요. 

서성이다! 

말없이 걷는 것 보다 가만히 생각하는 것보다 

서성이다는 성찰의 자세에 보다 근접해 있지 않은가요?

도시에는 무덤일지 성전일지 경건한 장소가 있어야 

도시의 기능을 할 수 있다는 말이 제겐 참 가슴으로 다가오더군요.

우리는 살아가긴 하지만 결국은 죽음을 향하여 가는 길인데

모두들 죽음을 모른 척 아니 오직 삶만이 있는 것처럼 살아가잖아요.

언제 어느 곳에서든  그 어느 운명보다 더 필연적으로 마주쳐야만 하는 그것을 말이죠. 

예수 믿는 나인데도 승선생에게서 흘러나오는 예수의 이름은 신선하기 그지없더군요.

예수의 세상 직업이 목수라고 하지만 

나무 없는 그 나라를 생각해보면 목수가 아니라 집짓는 사람이라고 확신한다구요.  

노무현 대통령의 기념관도 지금 설계중인데

처음으로 보여준다며 ... 

자연을 거스리지 않는 건물 

아니 오히려 자연 속으로 함몰해 가는 건축처럼 보이더군요. 

그래 생각해 보니 승선생이 장로님이신데 그냥 장로가 아니라 진짜 장로시구나....

그는 건축으로 깊은 기도를 하고 있구나... 생각이 들어왔어요.     

승선생이 이렇게 이야기 하지는 않았지만  

글을 쓰다 보니 정리되는 개념이 있네요.

<추방당한 자들을 위한 풍경>은

실체가 있는 건물들 ㅡ 파리 노틀담 사원 옆의 전쟁 기념관,

르코르뷔지에의 건물들, 라툴렛 수도원

감독 혼자 카메라 하나만으로 찍어낸 영화  봉쇄 수도원 카르투지오ㅡ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실체를  존재하게 하는 것은 

결국 사람의 기억이 아닌가,

풍경 역시 현존하지만 

그 풍경을 있게 하는 것은 

결국 사람의 사유 가 아닐까,  

풍경은 사유다. 

사유 역시 풍경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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