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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Sep 24. 2017

포도순절에 쓰는 편지

서로 편지나 보내자 삶이여 

실물은 전부 헛된 것 

만나지 않는 동안만 우리는 비단 감촉처럼 

사랑한다 사랑한다 죽도록 

만날수록 동백꽃처럼 쉽게 져버리는 길들 

실물은 없다 아무 곳에도 

가끔 편지나 보내어라 

선천적으로 수줍고 서늘한 가을인 듯 

오직 그것만이 생의 한결같은 그리움이고 

서역이라니/나의 서역 -비망록 /김경미   



포도순절입니다. 

낭만이란 말은 원래 일본풍이라 썩 그리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또 미묘하게 낭만적이기도 하야 

그대께 안부를 여쭈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대를 항시 그리워해서가 아니고 

그렇다고 자주 생각해서도 아닙니다.

이유는 포도순절이기 때문입니다.

포도순절에 고여있는 낭만을 모은다면 

적어도 1.8리터 크기의 페트병은 필요할거예요.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제 포도순절의 낭만은 그 정도이니 

너무 많다고도 너무 적다고도 하지 말아주세요..

나는 평형감각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죠. 

나이가 들어갈수록 참 필요한 거 아닌가요.

그러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게 저하되거나 형편없이 구겨지거나

드문 경우에는 자신만의 것을 내밀며 모두에게!!!를 외치기도 하니

조심스럽기 이를 데 없어요. 

평형감각의 가장 아래 중심축은 바로 역지사지입니다.

안다고 하여 혹은 추구한다하여 이게 또 모든 것에 적용되지는 않죠. 

아내로 오래 산다는 것은 

한사람을 많이 아는 일이고 그에 맞춘다는 일이기도 해요. 

맞춘다는 것은 그를 배려 수용하는 부분도 있으나 

아무래도 안 되는 부분은 

긴 세월을 긴장할 수 없으니 무시나 체념도 때로 필요하곤 하죠.

아이들의 부모가 되는 일은 이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구요.

만나면 반가운 벗들이 꽤 많습니다만

그 외 무수한 다른 관계들

그들 모두를 벗으로 뭉뚱거려 한 푸대에 담습니다.

벗과의 관계에서 잘 듣는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죠.

잘 듣는다는 것은 자기를 포기하는 일과도 흡사합니다. 

헛된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것도 필요하죠.

아니 어쩌면 그것은 중요한 삶의 스킬이기도 할거에요. 

포도순절이네요. 

시인의 말처럼 선천적으로 수줍고 서늘한 ....

어젠 오랜만에 북한산을 갔습니다.

누군가와 사귄다는 일은 

그리고 그를 연인 삼는다는 일은 굉장한 일이죠. 

생각만 해도 좋고

그의 품에 안기면 세상이 내 것 같아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어

그의 품을 걷노라면 지극히 정적인 상태가 도래하여

생의 철학이 사방 데서 다가와 체화되곤 했는데

그를 연인으로 삼고 한 이년 정도 정말 무서운 바람이 들었었는데

어제 내 연인은 

그저 아직 초록 중이었고

가끔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으며

아 그 서늘한 바람은 그와 나 사이에 생겨난 

사이로 부는 바람이었을까요.

그래서 그는 그냥 북한산이 되고

나는 그저 한 과객이 되었을까요.

우리는 이제 서늘한 관계로 식어져버린 것일까요.

그와의 관계에서 누렸던 그 충일함이 내 생에는 사라져 버린 걸까요.

그렇게도 당당하고 아름답던 

나를 아기처럼 안아주던 

품 넓은 내 연인을 이제 나는 잃어버린 걸까요. 

어젯밤 달도 무참하게 패여 있더군요. 

순식간에 말이죠. 

숨은 벽 가는 길에는 소나무 군락지가 있어요. 

사실 이미 북한산은 소나무 수풀은 아니에요. 

차라리 참나무수풀 이라고 해야 맞을 거예요.

그런데 그 소나무 수풀에 소나무 곁에 참나무 종류가 자라나고 있었어요.

거의 소나무 한그루에 어린 참나무 한그루....

여섯 가지 참나무 종류중 어떤 거냐고 묻지는 마세요. 

어린 참나무들은 떡갈나무 빼고는 다아 비슷하니까요.

지금은 저리 여릿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면 

저 참나무들은 쑤욱쑥 자라나서 소나무를 넘어설 거예요. 

그리고 넓은 잎으로 소나무를 고사시키겠죠. 

소나무는 태생적으로 햇살 지향적이긴 하지만

싸움을 못한다고 해요 

그래서 점점 밀려나는 거죠.

싸움 무서워하는 저와 비슷하죠. 

산을 내려오니 주차해놓은 주변으로 고마리가 가득 피어나있더군요. 

고만고만해선지 고만이라고도 불리는 꽃

정말로 작은 꽃송이들이 뭉쳐서 피어나는데

그 생김새가 얼마나 이쁜지.... 

산을 올라갈 때는 전혀 보이지 않던 것들이 

내려오는 길에 이렇게 많이 보인다는 것은 무슨 뜻이랍니까?

편지나 보내자 삶이여..

편지가 지닌 가장 좋은 장점은 

언제나 할 수 없는 누구와도 할 수 없는 

특별히 찻길에서는 아주 조심해야할 일방통행이죠. 

포도순절은 일 년 중 가장 섬세한 시간 이예요. 

누군가와 만났을 때 

끊었던 담배가 피우고 싶다거나 

가령 얼굴에 묻은 티를 가볍게 떼어주거나 라는,

아주 미미한 행위조차 의미 부여가 가능한 시간이기도 하죠. 

포도순절의 어느 하루 

늦은 밤 찻집에서 차를 마실 때

나뭇잎 점점 가벼워져 가고 

여름엔 들리지 않던 

나뭇잎들끼리 부딪히며 내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를가 들린다면 

그 시간을 

특히 조심해야 한다는 거죠. 

지금 저 시인이 그렇게 말하잖아요.,

편지나 보내자 삶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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