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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Nov 11. 2017

나를 보내지 마

어제 오후 가을비가 내렸다. 

가을비 치고는  제법 세찼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나를 보내지마’를 덮으며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가끔은 비오기전 바람이 마치 비의 전령사처럼 불어오기도 한다.

하늘 저쪽이 어두웠고 바람 휘몰아칠 때 동네 은행나무 이파리들이 

정 없다는 듯 챗머리를 흔들며 거침없이 떨어져 내렸다. 

창문이 약간 들썩거릴 정도였다.

마음이 참으로 고즈넉해왔다. 

책 마지막 몇 페이지를 놔두고 커피를 내린다. . 

물을 따르는 폿트에서 억새빛 같은 김이 퍼지고 커피 향기가 흩날린다.

진한 갈색으로 변한 물을 한 모금 마신다.

좋은 책을 읽을 때면 자주  그런 경험을 하곤 하는데

인생이란 뭔가?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 되고 결국은 그 순간 허망해지기 십상이라는 것, 

편안하다면 지극히 편안한 일상이다.

남편의 은퇴로 나도 더불어 한적해졌고 그 한적함은 내가 내내 바라던 것이다.

딸은 결혼해서 직장이 조금 먼 것 빼면  

좋아하는 신랑과 함께 새로 입주한 집 꾸미노라 행복해하고

아들래미 직장이 썩  그리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나 

본인은 좋아하니 그 또한 괜찮다.  

아흔두 살 엄마는 열한시쯤 경로당에 가셔셔 즐겁게 노시다 오시고

남편은 여전히 이런 저런 일로 자주 외출하고 

무엇보다  취미삼아 운동을 아주 열심히 한다.

가난하지만 다행히 부자를 부러워하는 갈증이 없으니 그 또한 은혜다.   

그러니 마음과 몸이 편안하기 그지없다.

그러다가도 

이렇게 책을 읽는 어느 순간, 

나이가 생각나고 

아 정말 많이도 살아왔네...뭐하고 살아왔지?~~~ 

아무것도 눈에 보이는 게  없네.

열심히 안 살아서도 아니고 남는 것이 있다 한들, 

그게 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몰라서도 아니다.

그저 좋은 책은 

답 없는 질문 앞에 헐벗은 채 서게 하고

솔로몬의 탄식이 저절로 나오게 한다는 것이다.     

언젠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관한 책을 읽다가
 세 사람의 영정을 자세히 바라본 적이 있다.
 오다노부나가는 젊고 잘생겼고
 눈매 코가 시원시원하고 입술은 주욱 찢어져 있고
 히데요시의 영정은 돈을 가지고 다이묘를 산 사람이라선지 좀 쪼잔한 인상이었다. 

이에야스의 영정은 인자하고 느긋하고 복스러운 할아버지 처럼 보였는데
 죽은 나이들을 살펴보니
 오다노부나가 49세
 헤데요시 62세
 이에야쓰 75세
 가장 많이 산 이에야스의 좌우명 비슷한 인생어가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걸어가는 것과 같기 때문에 절대 서두르면 안 된다>
 서두르지 않는 느긋함 때문에 오래 살 수 있었고
 노부나가의 예민함과 날카로운 직관력은
 그를 빨리 소진 시키지 않았을까?(물론 남의 칼에 죽긴 했지만 )
 한 시대를 벼락처럼 다스리던 이들도 모두 사라져 가는데

나 같은 사람이야.    

나를 보내지마....라는 경쾌해 보이는 소설을 읽기 시작할 때 

음 성장소설이군.....

이렇게 내밀한 타인의 삶을 내 것처럼 경험하게 해주니

글은 얼마나 좋은 벗인가, 

전혀 경험하지 못한 풍경이 내 앞에서 열리고

글속의 수많은 사람은 또 다른 내가 되어

꿈속에서도 보지 못한 곳에서 나를 살게 하니

이 얼마나 갸륵한 일인가,

그리고 글속에서 전능하신  이 작가는 

나의 상상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한도 없이 데려 가니

그리고 그의 문체는 아니 문체가 아니라 그가 삶을 바라보는 시각은

섬세하고 온화하여

마치 그를 바라보는 내 자신이 

섬세하고 온화한 사람이 되어가는 착각을 일으키게 하니

그러다가 결국은 슬픔에 빠지게 하니....

더군다나 세찬 가을비까지 내렸으니

‘나를 보내지 마’의 주인공은 클론이다.

이 복제 인간들의 기억과 사랑, 그리고 무참한 자기 생 앞에서 두려워하는 모습들이

그들을 바라보는 깨어있는 선생들의 모습이 말미에서 참혹하게 그려진다. 

삶이란 더할 수 없이 냉혹한 강이다.

깨어 있어야 만 되는데 깨어날수록 더 어렵고 고통스럽다.

그 흔한 사랑한다는 말한번 없이 사랑은 그들의 삶을 관통하고

서로가 사랑하면 기증을 늦추며 삼년 정도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소문...희망...이 그들 사이에 흐르고...

클론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이야기다. 

지난번 글속에서 이시구로가 노벨상을 왜 탔는지...라는 문장은 격렬하게 취소한다. 

감히 누가 이렇게 부드럽고 안온한 표정으로 이런 무서운 이야기를 할 수 있으랴,            

이즈음

늦가을그 청명한 것들이 만들어 내는 우수에 뉘라서 젖지 않으리.  .
 어쩌면 그 우수를 청명한 것만 만들어내겠는가,
 비면 비
 달이면 달
 나무면 나무, 
 별이면 별,
 하다못해
 저 멀리 흘러가버린 과거의 시간들 속에서도
 우수는 
 뚜벅뚜벅 소리 내면서 걸어 나오고
 모든 살아있는 것들, 그들에게서도 새어나온다. 

일 년 중 가장 쓸쓸하고 암울한 달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쇠락하는 11 월에 자살률이 가장 최저치에 이른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오히려 나무에물오르고 새싹 눈부시게 움터 오르면 자살률도 증가하기 시작해

오뉴월에 정점에 이른다니 

죽음에 대한 의지도 생명력 강건할 때 강해지는 것인가.     

'산음의 길을 따라 걷노라면

산천이 서로 맞비추며 어우러져 있어서

사람에게 하나하나 마주 볼 기회를 주지 않는다 .

(使人應接不假 )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들 때는 더욱 마음속의 

정회를 표현하기 어렵다(왕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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