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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Sep 09. 2018

오후 네시



하얀색 셔츠는 오월에 이스라엘 여행 가서 입으려고 산옷인데 한 번도 안 입었다.  집에 와서는 더워져서 못 입었다. 며칠 전 보니 칼라 셔츠가 누렇게 변색이 되었다. 새 옷인데.... 옥시크린에 담갔다. 별로 안 좋아져서 코튼 울 세탁 세제를 발랐다. 그래도 깨끗해지지 않아서 락스를 두어 방울 부었더니 세상에 순식간에 붉은색으로 변했다. 울 세제와 락스가 부딪혀버린 것이다.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함께 한 파국이 붉은빛으로 남았다. 사람들 사이의 얼룩이 생각났다. 이번에는 빨랫비누만 가득 칠해서 락스에 담갔다. 조금 옅어지긴 한데 이제는 핑크색이 되어버린다. 칼라를 떼어내 버리까? 아니면 스카프로 가리고 입어야 하나, 사람들 사이의 얼룩은 어떻게 가려야 하나.  예전보다는 덜하지만 여전히 옷에 관심이 많다. 미니멀 라이프를 자주 생각하지만  옷에 다다르면 슬며시 자신이 없어진다. 보자기 하나로 세수수건도 하고 머리 스카프도 하고 치마로 둘러 입기도 한다는 한비야의 여행 차림에 놀란 것도 아주 오래전 일인데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한다 하여 그 생각대로 살아지는 것은 아니다. 

 가령 나는 외로움에 견딜 자신이 생기면 자연 속에서 살아야지...라는 생각을 품고 있다. 사람이 없어도 좋고 문화나 예술과도 멀어져서 자연 만으로 충분해지는 그런 삶. 70살 정도 되면? 75살쯤? 팔십 정도 되면 너무 늙어 시골로의 낙향은 어려울 것 같은데..... 그러니 지금 못하면 아마 나중에도 못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면서도 쉬 행동에 옮기지 못한다. 핑곗거리 되는 장가 안 간 아들과 별로 시골을 좋아하지 않는 남편이 있으니 어우렁 더우렁이다. 아주 단출한 삶. 살림도 거의 없고 조금 적게 먹고 자연만으로 -작은 풀이던지 꽃이든지 나무만으로도- 충일한 삶인 나의 로망은 이루어지지 않을 확률이 높다. 도시 한 귀퉁이에 살면서  백로 시에는 흰 이슬을 생각하고 한로 시에는 찬이슬을 생각하며 가을이 깊어서 서리가 오겠네. 상강을 기억하며 시절 가리,

 시간은 보이지 않지만 세월은 흘러간다. 갔다. 그리고 갈 것이다. 무엇을 해야 충일할까, 충일한 시간에는 의미와 가치도 충만할까? 의미와 가치가 있다면 더 무엇을 바라지 않게 될까? 

 쟈크 데리다는 해체를 사랑이라고 표현했다. 사랑의 행위가 해체라는 것, 가령 그는 더블 리딩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퍼스트 리딩은 작가의 의도나 책이 품고 있는 의미를 이해하는 전형적인 독서를 의미하고 세컨드 리딩은  글이나 저자 그리고 독서자가 함께 쌓아 올린 그 독서를 해체시키고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것, 즉  다시 읽기 시작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그는 칸트를 읽을 때마다 언제나 처음 읽는 것처럼 읽었다고 한다. 

그의 철학은 우리 삶의 여러 가지를 변주해낸다. 

해체가 사랑이라는 것은 해체에 대한 새로운 인식하에서 가능한 일이다.

부수거나 허무는 것이 아니라 부수거나 허문 뒤에 도래할 새로운 것들에 대한 열린 자세.

억압하거나 한계 짓지 않으며 안 다하더라도 그것이 전부가 아닌 것을 알아야 하는 것.

그런 자세가 해체이며 그것이 또한 해체라서 사랑!이라는 것이다.

로맨틱함이나 낭만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누군가 말했다. 낭만 속에 로맨틱함 뒤에 당연히 어린 어두운 그림자에 눈을 감는 태도이기 때문이라는 그의 말을 나는 매우 공감했다. 그림자는 실체 없이 존재하지 않는 존재 아닌가, 

사실 세컨드 리딩은 새로운 사조나 철학이 아니라 우리 모두 지성이라는 이름하에 행해지는

이미 우리 삶에 배어있는 독서법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제목만으로도 이미 더블 리딩이다. 

책을 읽을 때 우리는 문자해독에만 그치지 않는다. 작가가 그린 새로운 세상 앞에서 나의 삶을 읽으며 나의 시선을 보게 된다. 나만의 시선 독법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퍼스트 리딩이 끝나기도 전 이미 우리는 더블 리딩을 시작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보는 것은 생각 없이도 보는 것을 말함인데 그래도 보는 것 자체가 아름다움을 느끼는 행위이다. 

 이즈음 길가다가 자주 분꽃을 본다. 분꽃은 정말 얼마나 고운지 사랑스러운지 어여쁜지, 꽃만 어여쁜 게 아니다. 분꽃 이파리는 정말 철학적이다. 뭐랄까 오묘하고 선량하며 그윽하다.  나는 의도적으로 꽃이 아니라 이파리를 자주 보는 사람인데 기실 이런 것도 조금 어쭙잖은 생각이기도 할 것이다.  왜냐면 사람은 단순하기도 해야 하니까 이파리보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지극히  자명한 일이니까.

 세상에 네안데르탈인의 무덤에서 꽃이 일곱 종류가 나왔다는 글을 읽을 때  나는 참으로 놀라지 않았던가,  그렇구나, 꽃은 그냥 무조건 아름다웠구나. 네안데르탈인에게도 꽃이 아름다워 보였으니 곡식과 함께 꽃을 무덤 속에 넣어주었을 것이다.  아름다우면 족하지 않을까,   

 분꽃은 오후 네시의 꽃이다. 거기다 꼭 소박함이란 단어를 마침표처럼 적어야 한다. 소박의 다른 말은 익숙과 흔함이다. 이게 얼마나 분꽃을 한정되게 만드는가, 다들 피어나는 아침 시간을 피해 오후 네 시면 벌어지는 분꽃은 시간에 대한 개념을 생각하게 한다. 거의 모든 꽃들처럼 소멸하기 위하여 아름다워지는 꽃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생으로 살짝 스며드는 꽃, 약간의 소슬한 바람 속에서 여름에게 잘 가라, 인사하듯 분꽃은 피어난다.

 장석남의 분꽃은 절창이다. /심은 바 없는데 분꽃은 뜰에 나와서/저녁을 밝히고/나에게 저녁을 이해시키고(략)이 세상에 올 때부터 가지고 왔다고 생각되는 그 비애(悲哀)보다도 화사히/

 이즈음 나의 비애는 차 안에서  음악을 들을 때 첼로 소리가 첼로 대신 마치 내 가슴의 현을 켜는 것처럼 싸아하게 다가올 때다.  마치 분꽃이 뜰에 나온 것처럼  그 순간 비애가 나의 모든 것을 누르고 나인 양 나선다.

  오늘이 백로. 나는 분꽃을 보았다. 내년 이맘때도 나는 분꽃에 대해 적을 것이다. 아니 매해 분꽃에 대해 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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