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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Jan 04. 2019

올해는 더욱 서성이리라

세화미술관에서




모든 존재의 목표는 사라지는 것 일수도 있겠다.

    

가령 세화미술관에는  실로 엮어진 집 세 채가  한 공간에 자리하고 있다. 

김홍도의 세한도 속의 단순한 집 같기도 하고 아주 어린아이들이 그리는 집 모양이기도 하다.

 (아, 아파트에서만 살아가는 요즈음 아이들은 집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집과 집사이의 공간, 지붕의 선, 그리고 나무와 숲이 함께 빚어내는 그런 집들을 바라본 적이 없는 우리 아이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아이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집일수도 있겠다) 

아주 단순한 형태의 그 집은 하얀 색깔의 도톰한 실로 엮어져 있고. 

어두운 미술관의 조명 아래서 안에 든 튤립나무 꽃 같은 등롱하나가 집을 한하게 밝히고 있다. 

작가는 자궁에서 태어나 집에서 살다가 다시 작은 관 혹은 묘라는 곳으로 가게 되는 

생의 여로를 함축해서  세 개의 집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실제로는 아주 거리가 먼 단어들이지만

 궁 , 집, 관, 이라는 상이한 개념들을 

익숙하게 이해하면서 하나로 엮어낼 수 있어야 한다.

작가가 작품을 짓듯이 

우리도 그 작품 앞에 서면 그런 사유를 지어가며 작가의 의도대로   

하나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개념은 현대미술의 근간이라서 아주 낯선 것들끼리의 조화를 작가가 이야기 할 때

우리는 그곳으로 가야한다. 그래야 그 작품을 이해할 수 있다.  

현대미술은 우리가 서있는 자리에서 탈출하게 하여 

새로운 자리에 서게 하는데 목적이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를 움직이게 하며 우리를 고착시키지 않기 위해 애쓴다. 

마치 건강하려면 몸을 움직이고 걸어야 하듯이

현대미술은 우리에게 ‘정신의 걷기’를 요구한다. 

감상이라는 고착된 자리에서 벗어나 작품 속으로 옮겨오라고 명령한다. 

그래야 새로운 세상으로의 이주가 가능할 것이라고 연설한다.

해아래 새로운 것이 어디 있으랴만 새롭지는 않다 하더라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너그러운 사람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박혜원의 궁은 설치미술 답지 않게 아주 산뜻하고 아주  멋지고 아주 예뻤다. 

그래서 아 좋다...정말 좋네.... 라고 빈 미술관에서 혼자 중얼거렸다. 

사유에 들어가기 전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모든 느낌에 우리는 어쩔 수 없는 노예이다. 

이제까지 그리 살아왔으니까, 

그러나 의미 가치 개념을 떠나 아름다운 것은 가장 보편적인 느낌으로 

이 또한 보존할 가치가 있다.

아름다움은 그 갈래가 형형색색이질 않는가. 

꽃이 아름다워 꽃을 바라보다 보면, 지는 것이 보이고 꽃 진자리도 아름다워진다.

열매가 이어지고 푸르른 잎에 눈빛이 반짝이게 되며 그러다가 나무와 나무의 목피 그리고 그들이 살아온 자태의 하나인 옹이조차  아름다워진다.

아름다움은 작품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러니 여기쯤서 서성거려도 괜찮다.   

 

수많은 면사를 가지고 

공간에 공간을 존재하게 하는

공간에 대한 새로운 의미부여와  

공간의 아름다움을 인식하게 하면서 

동시에  공간을 낯설게 하는 강은혜의 작품 

실이라는 선을 사용하여 수많은 점과 점을, 선과 선을 연결시킬 때 

마치 명상을 할 때와 같았다는 작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단순한 작업이 빚어낸 미학적 느낌이 상당했다. 

특히 미술관 복도에 설치한 대각선의 선들이 빚어낸 시적 느낌은

그들이 빚어낸 그림자와 함께 나를 서성이게 하는 절묘한 울림을 주었다. 

작품을 설치하는 노고야 말해 무삼하지만 

설치된 작품은 촘촘하지만 간결하고 간결하면서도 수많은 사유의 결을 생각하게 한다.      

정다운의 패브릭으로 하는 공간드로잉도 새로웠고

차승언의 섬유로 회화를 하는, 섬유로 조각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들도 신선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에 ‘난데없이 들어온 추상의 개념’을 빈틈으로 처리한 

천으로 만들어진 공간속 상자의 개념은 놀라웠다. 

아마도 차승언 작가는 ‘추상’이 수많은 사회적 여건과 역사라는 시간 속에서 

서서히 다져온 결과물로 생각한 듯, 

그 추상이 우리나라에는 유행처럼 번져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 뿌리에 대해 고심하는 작가인 듯 싶었다.  

   

아름답기조차 한 이런 전시 작품도 전시기간이 끝나면 해체되면서 사라질 것이다. 

어디론가 자리를 옮겨서 존재한다 한들 결국 이 공간속의 작품은 아니니까, 

결국 설치 작품들은 사라지고 만다는 것, 

그러니 현대 미술의 한 지향점은 소멸에 있다는 것,  


생각해보니 삶도 그러하다. 

설령 죽음이 사라짐이 

목적이나 목표는  아니더라도 

그 귀결이 그러하니

목표라고 해도 좋고 목적이라고 해도 상관 없으리.

사라지는 결론에는,  


그러고 보니  매일 죽는다는 바울의 고백은 얼마나 현대 미술적인가, 

또 얼마나 자유로운가, 

삶을 초월한 그의 삶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죽음을 생각하며

삶속에서

서성이는 것, 

서성임은 삶의 정직한 한 양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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