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마그리트 1898. 11. 21 ~ 1967. 8. 15
지난 달 딸과 함께 대만 여행을 했다. 패키지여행을 할 때마다 항시 아쉬웠던 것은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다. 거대한 루블에서는 긴 시간을 기다렸고 종종걸음으로 겨우 상견한 모나리자, 과장을 해보자면 정말 콩만한 그림, 좀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하니 뒤에 오는 사람들에 의해 밀려나야 했다. 이번 대만여행에서는 그림을 좋아하는 딸과 의기투합하여 닷새 중 이틀을 온전히 미술관에서 보냈다. 사실 미술관 투어는 미술관 작품뿐 아니라 건축투어와 주변 경관투어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지는 내실 있는 여행이다. 우리는 그 유명한 고궁 박물관 문이 열리기도 전에 도착 기다렸다가 입장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반대로 삼층부터 시작해서 중국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모나리자처럼 작은 옥배추와 동파육을 마치 내 것이라도 된 듯 샅샅이 살펴볼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은 타이빼이 미술관으로 향했다. 세상에, 르네마그리트 특별 전시회를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길게 늘어선 줄과 최소 12000~15000원을 받았을 알찬 전시였는데 우리 돈으로 2000원 정도에 입장, 사람이 거의 없는 그곳에서 나의 짧은 한문과 딸아이 영어를 합한 ‘서로 도슨트’가 되어 르네마그리트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인들(The Lovers)을 만났다.
연인들은 모나리자 보다 더 작은 그림이었지만 보는 순간 갑자기 훅을 하나 맞은 것 같았다. 검은 양복을 입고 검은 넥타이를 한 남자와 붉은 옷을 입은 여인, 그들의 키스, 하얀 베일을 뒤집어 쓴 연인들의 키스, 연인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알 수 없는 나와 타인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일까, 겉이나 조건만을 보는 현대인의 단면을 저리 표현해본 것일까,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타인이 기실은 전혀 알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가, 어쩌면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볼 수 있는 연인, 키스라는 사랑의 표현을 하는 순간조차 자신을 내어주지 못한다는 외로움의 절규인가, 저들은 정말 사랑했을까, 무엇보다 저 연인들은 사랑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게 아닌가, 혹시 나 역시 저런 그림 속 관계로 살아가는 게 아닌가,
르네 마그리트의 어머니는 깊은 우울증으로 인해 마그리트가 14살때 강에 투신자살을 했는데 그 때 옷을 뒤집어 쓴 어머니의 시신을 보았다고 한다. 어쩌면 하얀 베일은 마르그리트에게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단절과 이별을 상징하는 은유일수도 있다. 아무리 사랑한다 한들 결국은 이별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는 삶의 한 지향점을 의미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데리다도 말하지 않았던가. 모든 우정 속에는 애도(죽음에 의한)가 우선한다는 것을,
마그리트는 “나는 나 이전에 그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실제 전시에서 그의 삶을 기록한 사진들은 그의 독특한 사유방식과 현실을 초월한 다양한 실험을 보여주고 있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이 무의식에 천착했다면 그는 명징한 의식으로 초현실주의의 데페이즈망(dépaysemen ‘추방하는 것’이란 뜻으로 일상적인 관계에서 사물을 추방하거나 존재하지 않을 곳에 존재하는 것을 의미) 을 실현했다. 공중에 떠있는 ‘피레네의 성’이나 중절모를 쓰고 외투를 입은 중년남자들이 비가 되어 내리는 골콩드ㅡ어찌보면 공간에 결박되어 있는 것처럼도 보이는ㅡ미셀푸코의 화두가 되기도 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철학어로 회자된다. “당신의 그림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말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저보다 더 운이 좋은 사람이군요.” 르네 마그리트는 대답했다. 그의 작품은 사실적인 기법에 충실하다. 거기에 풍성한 상상력과 이질적인 존재를 더해 낯선 화법으로 우리에게 질문한다. 어떻게 그릴 것인가 보다는 무엇을 그릴 것인가 고민했던 작가,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명제를 마음에 품고 산 사람 “나는 나의 작품을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게 하고 싶다.”고 한 르네마그리트는 화가이지만 철학자다.
깊고 고독한 사랑의 심연을 터치하는 작품, 연인들(The Lov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