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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Sep 30. 2018

삶에 지친 자들

페르디낭 호들러 (Ferdinand Hodler, 1853~1918)

                                    페르디낭 호들러 (Ferdinand Hodler, 1853~1918)  삶에 지친 자들    





 가을은 결국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한다. 가을이 되어 풀이 자라지 않게 될 때 사람들은 풀을 벤다. 베어낸  풀냄새가 그득한 공원을 거닐 때면  싸아한 풀들의 향기는 비명 소리가 되어 몸으로 스며든다. 잘 가라, 풀들이여, 어찌 이별을 고하지 않을 수 있으리, 회화나무는 느리게 움을 티운다. 그러면서도 아주 이르게 가을채비를 한다. 초록 옷을 벗고 노란 옷으로 갈아입는 회화나무 아래에서 나뭇잎 몇 이파리 바람결에 휘날릴 때면 삶의 끝을 서늘한 시선으로 응시할 수밖에 없다. 어느 시인이 그랬던가, 슬픔은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거라고, 슬플 때 당신은 당신에게 가장 가깝다고, 

 사람의 시선은 참으로 오묘하다. 시선은 나 아닌 무엇을, 혹은 타자를 바라보지만 실제 그 시선은 거의 언제나 나를 보여주곤 한다. 말로 하지 못하는 혹은 할 수 없는 진실한 나를 담고 있는 시선,  어떤 말보다 오히려 더욱 깊게 나를 표현해주는 것이 시선이라는 것을 페르디낭 호들러의 그림은 선명하게 포착해낸다. 어쩌면 그림은 말로 하지 못하는 수많은 언어들의 간극을 순간적으로 채취해 펼쳐 보이는지도 모른다. 제목처럼 삶에 지친 자들이 다섯 사람이 있다.  오랜 시간을 살아왔고 그들의 얼굴에 새겨진 고통의 흔적은 적나라하다. 작가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명명한 페러렐리즘parallelism은 질서 있고 조화로운 방식으로 반복되는 기법을 말하는데 다섯 명의 남자는 질서와 조화의 지향점이기도 한 ‘공평한’ 모습으로 같은 공간에 앉아 있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응시하고 있지만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살아왔던 혹은 살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남은 생에 대한 응시라고나 할까, 어쩌면 그들의 시선 속에 응축되어 있는 것은 이 삶의 끝에 무엇이 있으랴 는 절박한 질문일 수도 있다.  장식 없는 길쭉한  의자 위에 나란히 앉아있는 수사복 차림의 네 사람은 환자임이 분명한 한 남자ㅡ오랜 시간을 앓아누운 티가 완연한  도드라진 쇠골과 덩어리진 머리카락 그리고 그의 두 손은 맞잡을 기력도 없는 듯 쳐져있다. 그는 마치 가까이 다가온 죽음의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ㅡ 환자를 위해 기도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일까, 기도하는 듯한 모습으로 손을 맞잡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손잡음이 그다지 간절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그들의 눈빛, 시선, 그들의 응시는 지나칠 정도로 상이하다. 호들러는 수많은 스토리를 점철해서 만들어 내야할 캐릭터를 겨우 두 눈의 응시, 시선으로 가름해내고 있다.  어쩌면 작가는 저들 다섯 사람이 동시에 바라보고 느끼는 고통을, 거친 모습으로 그들 앞에 좌정하고 있는 고통을 저들의 시선을 통해  그려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첫 번째 사람의 시선은 구슬프다. 금방이라도 그 눈동자에 눈물이 어릴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삶에 덧입혀진 고통을 응시하며 무연히 바라보고 있다. 그와 조응하는 듯 보이는 다섯 번째 사람은 내게 다가온 고통이여, 고난이여, 슬픔이여, 아직도 내게서 더 얻을 것이 있느냐? 눈을 똑바로 뜨고 있다. 두 번째 사람은 슬픔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슬픔에 잠겨있는 듯 하고 네 번째 사람의 시선은 고통 속에서 고통을 경멸하다가도 어디론가 혹시 도망칠 구석이 없나를 면밀하게 살피는 것 같다.  호들러는 연인이 암에 걸려 죽어가는 모습을 수도 없이 그려냈다. 모네도 죽어가는 까미유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어찌 그리 잔혹할 수가....? 는 천진한 생각이다. 죽어가는 사람 곁에서 화가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죽어가는 사람을 그린다는 것은 죽어가는 사람의 생명에 대한 존재증명이자 화가가 할 수 있는 절대적 사랑 표현이었을 것이다.  호들러의 나무꾼이란 작품은 스위스 50프랑에 새겨져 있을 정도로 스위스에서 추앙받는 화가이지만 사람들의 시선만으로 보이지 않는 고통을 그려낼 정도로 그의 삶도 쉽지는 않았다. 철학과 상징이 담긴 그의 그림을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그림의 왼쪽에는 메마른 나무가 한 그루 설핏 보인다. 가느다란 줄기에 몇 이파리 안남은 걸로 보아서 깊은 가을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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